6선 의원이었던 김상현(1935~2018)에게는 아호가 두 개 있어. 하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후농(後農)’이야. 이 아호를 지어준 사람은 요즘 말 많은 고은 시인이란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정치인 김상현과 시인 고은은 감방 동기가 됐다. 그 인연으로 고은 시인은 김상현에게 아호를 선물했는데 그 뜻은 이랬어. “인생 내내 고생만 하고 희생타만 쳤으니 인생 후반엔 농사 잘 지어서 좀 많이 거두고 살아라.”

또 하나의 아호는 역시 시인이자 민주화 투쟁을 함께했던 신경림이 지어주었어. ‘무경(無境)’이야. ‘네 편 내 편 경계가 없다’는 뜻이란다. 평생 ‘정치는 타협과 절충’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고, 몇 번 얼굴 보면 형 아우 하는 친화력을 과시했다는 김상현에게 안성맞춤의 아호일 것 같구나. 가족들에 따르면 김상현은 생전에 ‘후농’보다 ‘무경’을 더 선호했다고 해.

아빠는 이 두 아호, 후농과 무경은 가히 김상현 의원의 일생을 대변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해. 먼저 후농의 면모를 들여다보자꾸나. 그는 수많은 동화 속,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어. 어머니는 전쟁 통에, 아버지는 김상현 나이 열넷에 세상을 등지셨으니 그 후 인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지. 구두닦이로 시작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세상 바닥을 쓸고 다니던 김상현. 그런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건 정치가였어. 소설가 김성동이 쓴 〈한국 정치 아리랑〉에는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 크게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에 울컥하는 마음에 남산까지 뛰어 올라가서는 “이 세상을 사람의 세상으로 만들어보겠다”라고 다짐하는 김상현의 모습이 등장해.

ⓒ연합뉴스김상현(오른쪽)은 김대중(왼쪽)의 후원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1995년 11월 회의 중인 모습.

이윽고 젊은 김상현은 또 하나의 지울 수 없고 내려놓기 어려운 운명과 조우하게 돼. 그가 등록한 웅변학원 부원장의 이름이 김대중, 바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그분이었거든. 김상현은 김대중의 후원을 받으며 정계에 입문했어. 1965년 치러진 서울 서대문갑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은 쟁쟁한 정치인들을 제치고 김상현을 추천했고 김상현은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어. 그런데 그의 등원 기록을 보면 6·7·8대 3선을 한 뒤 바로 14대로 건너뛰는 게 보여. 8대 총선은 유신 직전인 1971년, 14대 총선은 1992년이었으니까, 거의 20년 동안 ‘실업자’로 지낸 셈이야.

제8대 국회의원 임기 중 김상현은 고위층을 상대하는 호스티스로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인숙 사건을 언급하며 “정 여인에 관계된 사람이 26명이나 된다고 하고, 총리가 관계되었다, 대통령이 관계되었다, 이렇게까지 얘기가 돌아다닙니다”라고 폭탄선언을 해버렸지. 이때 여당의 국회의원이자 돌격대장이라 할 차지철은 “사과시켜라”고 악을 썼고 유신 선포 후 김상현은 정보기관에 끌려가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린 채 모진 고문을 받았어. 이후 유신이 선포되면서 그는 감옥에 갔고 여러 번 감옥을 들락날락한 것은 물론 73차례에 달하는 가택 연금(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을 당할 정도로 시련을 겪었지. ‘젊어서 지지리도 고생했으니 말년엔 농사 좀 지어라’는 아호가 왜 나왔는지 알겠지.

우리 역사에 투사는 많지만 견결함과 유연함을 함께 갖춘 정치인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 20년간 치열하게 싸우고 원수같이 대들면서도 적장(敵將)과 스스럼없이 만나 담판을 벌이고 인간적인 관계까지 맺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었지. ‘무경’ 김상현은 그 예외 중의 한 사람이었어.

정인숙 사건 폭로 때 김상현에게 욕설을 퍼붓던 공화당 의원 차지철은 사석에서 ‘국회 동기’로 김상현과 절친한 사이였어. 2013년 세상을 떠난 조직폭력배 서방파 두목 김태촌은 김상현과 친하게 지낸 탓에 정치범들이나 끌려가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신세를 졌다고 밝힌 바 있지. 또 10·26 후 계엄령하에서 재야 인사들이 결혼식을 위장해 민주화를 촉구한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때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여기는 정말로 악명 높았던 고문 현장이란다)에 끌려가서는 흥건하게 두들겨 맞다가 별안간 전두환 앞으로 끌려가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신 일도 있었다고 해(〈월간조선〉 2013년 1월호 김상현 인터뷰 중).

깡패부터 라이벌 여당의 국회의원·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피하는 사람이 없었던 ‘대한민국 3대 마당발’ 김상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정치 역정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싱거웠던 건 아니야. 상당히 오랫동안 김대중이라는 큰 정치인의 그늘 아래 있었으면서도 그 거목의 가지가 아니라 엄연한 나무로 옆에 오롯이 자리했고, 김대중이 잘못 판단한다 싶을 때에는 뚝심 있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거나 그와의 결별도 서슴지 않았어.

지난 4월 인생의 ‘정거장’ 떠나 영면

아빠가 여러 번 얘기했던 6월 항쟁, 즉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해온 국민이 일어섰던 그 거대한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이 결정적이었다.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새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뼈아픈 낙선을 겪었어. 후일 김대중 본인이 당시의 선택을 뼈아프게 후회한다고 했거니와 김상현은 통일민주당에 남아 김영삼을 도왔다.

하지만 김영삼이 여당과 야합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오늘날 자유한국당의 원형)을 탄생시킨 3당 합당 당시 김상현은 격렬히 분노한다. 역사에 남을 사진이 된, 노무현 의원이 “이의 있습니다!”라며 주먹을 불끈 쥔 사진 옆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이가 바로 김상현이야. 이후 다시 운명적 동반자라 할 김대중과 함께하지만 그리 빛을 보지 못했어. 야당 대표는 고사하고 사무총장, 그 흔한 원내총무도 못 해보고 정계를 마감했으니까 말이야.

ⓒ연합뉴스1990년 1월 3당 합당에 항의하는 김상현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노무현 의원(맨 왼쪽).

김상현은 이런 유의 서운함을 분노로 표출한 적이 없었어. 고비길 굽이굽이마다 김상현을 견제했던 김대중 측근 그룹의 좌장 권노갑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김상현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깍듯하게 나를 ‘형님’으로 대하며 어떤 자리에서도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내가 만나본 정치인 가운데 가장 통이 크고 포용력이 큰 사람이다(〈동아일보〉 2014년 6월14일자).” 실로 무경(無境)이랄밖에.

그 역시 옛 정치인 중 하나이고,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몇 차례 사법처분을 받은 사람이야. 그 흠결을 부정할 순 없지. 그걸 전제로 한마디 덧댄다면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정거장’이었어.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항상 주변 사람들과 나눠 쓰려고 해서 “김상현 주머니는 정거장”이라는 뜻에서 나온 별명이라지. 만년에 농사 잘 지어 대박 나라고 지어준 후농(後農)은 비록 이루지 못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무경(無境)이었던 김상현은 올해 4월 파란 많은 인생의 ‘정거장’을 떠나 영면에 들었단다. 고인의 명복을 함께 기원하자꾸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