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아씨와 고동민씨는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만나 9년을 연애했다. 결혼 후에도 극단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백화점 판매직이며 마트 배달 같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했다. 과자 한 봉지, 컵라면 하나를 사는 일에도 결심이 필요한 날들이었다. 이씨 뱃속에서 숨 쉬던 내린의 존재를 알았을 때, 고씨는 배고픔과 맞바꾸고도 괜찮았던 연극을 내려놓았다. 쌍용차는 고씨가 일생 처음 가져보는 정규직 일자리였다. 워낙 없이 시작한 살림이라 갑자기 확 피진 않았다. 대신 ‘앞으로’를 계획할 수 있다는 기대의 무게가, 그 안정감이 월급봉투와 함께 쌓였다. 2년 뒤 이씨는 둘째 이든을 낳았다.
작은 빌라에서 아파트로 집을 옮길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나고서야 고씨는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공장 안에서였다. 동료들을 모아 ‘노동자 연극’을 만들어 다른 사업장을 돌기도 했다. 내린과 이든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부터 이씨 마음에도 여유가 깃들었다. 도서관에서 〈화차〉 〈모방범〉 등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에 푹 빠져 지냈다. “애들 키우느라 바빠서 몰랐는데 오랜만에 내 시간을 가지니까 몸에 에너지가 축적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일을 할 때가 됐구나, 싶었어요.”
그해 봄 평택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쌍용차는 2008년 12월부터 필수 근무자를 제외하고 일시 휴업하는 날이 잦았다. 2009년 1월에는 법정관리가 신청됐고, 임금이 체불되기 시작했다. ‘설마’가 사실로 확인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법원이 회생절차 개시를 결정하고, 쌍용차가 2045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경기지방노동청에 신고했다. 고씨와 동료들이 파업을 결의하는 동안 이씨 역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료의 아내들을 만나러 다녔다. 셋째 임신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남편에게는 걱정거리를 더하기 싫어 그 사실을 숨겼다. 얼떨결에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위원장을 맡고도 마음이 편했다. 배가 부르기 전에는 끝나겠지 생각했다.
공장 안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소식만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연두색 옷을 맞춰 입은 엄마와 아이들은 매일같이 공장 정문 앞에서 모여 뛰어놀았다. 낮 시간이면 아이들이 줄넘기를 넘는 동안 불어오는 봄바람이, 저녁 어스름이면 봄기운처럼 아른거리던 수백, 수천 개의 촛불이 고단함을 견디는 힘이 됐다. 쌍용차 가대위 조직 소식을 들은 다른 파업 사업장 가대위에서 응원전화를 해오기도 했다. 삼호중공업 가대위 ‘동지’는 자기네는 73일을 싸웠다며 초반부터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도 속으로는 ‘그렇게 오래? 아니 무슨 파업을 73일이나 해?’라고 생각했다니까요(웃음).”
경찰은 정말이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도 한때의 동료들이 목을 죄어왔다. 회사 측은 이른바 ‘산 자’로 구성된 노동자를 앞세워 ‘죽지 않으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대열의 맨 앞줄에 남편 고씨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형님’이 있었다. 그는 가대위 맨 앞줄에 선 이씨를 모른 척했다. 파업을 풀라고, 회사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여름이 시작되던 6월26일, 노·노 충돌을 지켜보며 이씨는 크게 상심했다. 이후 옥쇄파업이 77일간 이어지는 동안 이씨는 웃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미치고 딱 죽을 거 같은데 힘내라고 하니까 연대하러 온 사람들도 어느 날은 너무 미운 거죠. 고향 친구가 전화 와서 무슨 일 있으면 당장 연락하라고 당부하는데도 막 쏘아붙였어요. ‘전화하면?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뭔데? 어쩔 건데?’ 그 친구랑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못해요.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친구와도, 가족과도 멀어졌다.
이웃과 멀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108세대가 사는 한 동짜리 아파트는 소문이 빨랐다. 사복형사가 경비실에 드나들며 남편 고씨가 집에 다녀가진 않았는지 CCTV를 확인하고, 이웃은 ‘오늘도 사복형사가 서성이더라’며 걱정을 건넸다. 마주치는 이웃들이 건네는 안부가 모두 비난처럼 느껴졌다. 그해 8월8일 노사 합의로 파업을 풀었지만 고씨는 구속자 94명 중 한 명이 되어 수원구치소에 갇혔다. ‘사회적 대타협’을 운운하는 현수막이 평택 시내 곳곳에 나부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누굴 만나면 저 사람이 비해고자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척일지도 모르니까 너무 조심스럽더라고요. 너무 많은 사람이 연관됐던 사건이기도 하지만 평택이 참 작거든요.” 할 수 있다면 쌍용차 사건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면회를 다니려면 평택에서 아주 멀어질 수가 없었다. 임신부의 몸으로 급하게 구한 평택 외곽의 집은 겨우내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실감나지 않는 손배·가압류 금액을 들여다보고 또 봤다.
지난 4월, 해고 당사자가 아닌 아내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이씨는 시큰둥했다. “뭘 아내까지…. 이런 거 자꾸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었고….” 연구팀 요청에 따라 의견도 내고, 포커스그룹 인터뷰에도 참여했지만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막상 설문지를 받고 보니 지난 10년의 기억이 마디마디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문항에 체크하면서 ‘내가 이랬구나’ ‘참 힘들었구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34~36쪽 기사 참조)를 발표 전 미리 조심스레 내놓으며 우려하는 연구팀과 달리, 이씨도 이씨의 동료들도 큰 감흥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다들 비슷하게 사는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는 지난 10년을 어떻게 보냈길래 이런 결과가 아무렇지 않을까. 어쩜 이렇게 타격감이 하나도 없을까. 이게 당연한 게 아닌데, 왜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남편 고동민씨는 지난해 4월 복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고씨가 7년을 일하고, 8년을 쫓겨나 있었던 공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날 이씨는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남편이 복직하면 그저 좋을 줄 알았다. 복직 하나 바라면서 그 긴 시간 버텨왔으니까. 그런데 17년을 함께 살았던 사람이 그렇게 낯설 수 없었다. “부부관계가 그때부터 1년 넘게 정말 최악이었어요. 지금도 대화 잘 안 해요(웃음). 마음을 다잡지 못하겠더라고요. ‘고동민이 먼저 복직하면 남은 사람은 어떡해?’ 했다니까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설명 못할 안도감이 드는 거예요. 가대위 언니들한테 전화해서 막 울었어요. ‘우리 먼저 복직해서 미안하다’고.”
누구도 정하지 않았지만 집에서 ‘쌍용차’는 금기어가 됐다. 이씨는 지난 10년간 세 아이에게 쌍용차 문제를 입 밖에 일절 꺼낸 적 없다. “엄마 오늘 조금 늦어”라고 하면 내린도, 이든도, 가온도 무슨 이유인지 알아듣고 더 묻지 않았다. “애들은 아빠의 해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늘 궁금하긴 한데 그 기억을 끄집어냈다가 애들이 힘들어하기라도 하면 제가 감당을 못할 거 같아요. 엄마들끼리도 애들 얘기는 안 해요.”
파업이 끝나고 내린은 조용히 자주 울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는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섯 살 이든은 엄마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난리가 났다. 어른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심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세 아이 모두 걱정했던 것보다 잘 자라주었다. 한 번씩 아이들이 분노를 주체 못하는 것 같으면, 사춘기 아이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몰래 죄책감이 든다. “나 때문인가, 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요.”
파업을 경험하면서 그의 세상도 넓어져
그래도 지난 10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파업을 경험하고 함께 싸우면서 이씨의 세상도 넓어졌다. 아이와 남편과 가정이 세상의 전부였다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지 제가 아니까, 내가 당사자가 되어 느끼는 풍경은 되게 다르더라고요.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몫을 하며 살 건지를 고민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씨는 쌍용차 기사 댓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는다. 댓글이 이씨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지만, 그 댓글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 “맞는 말이기도 하죠. 제 남편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이고, 4대 보험도 되고…. 이게 ‘꿈의 직업’이 된 거잖아요. 근데 이게 당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 번씩 ‘이정아’ 이름을 걸고 답글도 일일이 달아본다. ‘경찰한테 쇠파이프 휘두른 폭력 새끼들’이라는 댓글 밑에는 이렇게 달았다. “이명박 청와대가 개입하고 지시해서 일어난 파업이라는 건 아세요? 테이저건과 다목적 발사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에 맞서서 벌어진 일이에요. 노동자 잘못이 아니에요.”
마음의 일부는 여전히 폐허다. ‘진짜 해결’이 뭘까 계속 생각한다. 복직이 되면 모든 게 끝나는 걸까? 당사자가 되어보니 10년간 엉켜 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짐작만 하고 있던 국가폭력이 증거와 함께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사실로 발표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허무하다. 요즘은 분노를 잃었던 마음을 살펴 화가 나면 화를 내려고 노력해본다. 이 긴 고통을 그냥 없었던 일로 넘기고 싶지 않다. “국가가 건 손배 취하하고, 해고자 복직시키고… 무엇보다 지난 10년간 스스로 죄책감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낱낱이 짚어서 사과를 깊이깊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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