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시성〉이 개봉된다는 얘기 들었지? 645년 벌어진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중, 골리앗 같은 제국의 군대를 다윗같이 막아섰던 작은 성 안시성의 사연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넉넉할 거야. 전쟁이란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악함, 비겁함과 용기, 지혜와 우둔함이 뒤섞여 이루는 사연의 종합판 같은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몇 주간 한국 역사상 기억할 만한 전쟁과 전투,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해. 먼저 안시성 전투부터.

ⓒ연합뉴스고구려 때 안시성은 중국 랴오닝성 하이청시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뭘까? 그건 명분이야. ‘자유’든 ‘해방’이든 ‘제국의 위엄’이든. 하다못해 2003년 미국이 내세운 것처럼, 이라크에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든.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구려 27대 왕 영류왕을 죽이고 심지어 시신을 토막 내서 시궁창에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 태종은 동산에서 즉각 애도 의식을 올리고 조문 사절을 파견한단다. 즉 “임금을 죽이다니 이건 패륜이다”라는 명분을 만든 거지. 그 외 여러 가지 핑계를 더하여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나섰어.

아빠는 우리 역사에서 과대평가된 인물 중 하나로 연개소문을 꼽아. 연개소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결국 고구려 멸망의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보기 때문이야.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몰살하고 수립한 독재 체제는 당연히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지. 이전의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을 노출시켰어. 요동성 등 수나라 백만 대군을 거뜬히 버텨냈던 성이 함락된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지. 백암성 같은 곳에서는 성주 손대음이 은밀히 당에 항복을 청하기까지 했어.  

아빠는 연개소문의 책임이 크다고 봐. 칼 여섯 자루를 차고 사람을 밟고 말에 올랐다는 연개소문의 공포정치는 필연적으로 내부의 불만과 균열을 불러왔을 테니까. 안시성 성주도 연개소문에게 맞선 사람 중의 하나였어. 당 태종은 이런 말을 하고 있어.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정예병들이다. 그 성주가 재능과 용기가 있어서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항복하지 않았고, 이에 막리지가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킬 수 없어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안시성의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안시성이 당나라 군에 포위됐을 때 연개소문은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15만 대군을 출동시켜 안시성 구원에 나섰지. 이 회심의 대반격 작전에서도 안시성과의 합동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안시성과 연개소문의 구원군이 연락을 취했다는 기록도 없지. 고구려 15만 대군은 결국 당나라 군의 계략에 걸려 궤멸되고 말았어. 또 이 군대를 지휘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쉽게 항복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약점을 이용한 방책까지 서슴없이 내놓았다. 역시 연개소문 치하 고구려 내부의 이반 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런데 고연수가 재미있는 말을 한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 집과 가족을 돌보고 아껴서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함락할 수 없습니다.”

안시성은 그렇게 똘똘 뭉쳐 있었고 그 정점에 성주가 있었어. 배신자 손대음의 이름은 중국 기록에 남아 전해지지만 이 성주의 이름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알지 못했어. 천년 뒤에야 ‘양만춘’이라는 출처 모를 이름이 거론될 뿐이야. 왕을 죽이고 고구려 귀족들 태반을 몰살시킨 권력자 연개소문의 공격을 버텨냈던 이 안시성주는 당나라 군의 맹공에 직면하게 돼. 공성전이 반복되고 온갖 공성 기계와 계략이 동원됐지만 안시성은 흔들리지 않았어. 이를 지켜보던 당 태종은 토산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연합뉴스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안시성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흙으로 산을 쌓아서 성벽보다 높이 만들겠다는 토산 공사는 안시성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을 거야. 부실공사 탓인지 이 토산이 무너져버리는데, 흙은 사태가 나서 쏟아지며 숱한 당나라 군의 목숨을 삼켰다. 이때 안시성 성벽마저 뒤덮어버렸단다. 뜻밖에 맞이한 백척간두의 위기였어. 안시성의 생명줄이던 성벽 일부가 사라졌으니까. 그때 안시성주는 궁즉통(窮則通), 즉 궁하면 통한다는 이치를 극적으로 구현한다. 무너진 성벽 밖으로 뛰쳐나가 토산을 점령하고서 참호를 파고 불을 놓아 이쪽의 요새로 만들어버린 거야. 이후 당나라 군과 고구려 군 사이에는 무시무시한 토산 쟁탈전이 벌어졌어. 안시성 전투의 하이라이트였지. 성벽을 사이에 둔 공성전도 아닌 흙더미 위 혈투에서 고구려 군은 당나라 군의 악에 받친 공격을 끝내 격퇴한다.

안시성주는 응원군이 완전히 차단된 상황에서 자신과 성 사람들의 힘만으로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강의 군대(당 태종의 군대는 한족만이 아니라 돌궐·철륵 등 북방 민족이 결합한 일종의 연합군이었어)를 막아서는 기적을 이뤄냈어. 이는 이후로 천수백년 동안 한반도 사람들의 자존심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 고려와 조선 사람들은 당 태종이 화살에 맞아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공식 기록에는 없다)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당 태종의 눈이 빠졌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오히려 수나라의 침입을 거뜬히 물리친 고구려가, 비범했을망정 독단적이고 잔인했던 연개소문의 등장 이후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지켜보기 바란다. 또 고립무원의 성에서 세계 제국의 군대를 맞아 무려 석 달이나 싸운 이름 모를 성주의 저력은 무엇이었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당나라 군이 돌아갈 때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며, 성주 홀로 성에 올라 작별 인사를 했고 황제는 비단 100필을 내려 치하하였다”라고 기록돼 있어. 당 태종의 관대함을 높이려는 왜곡된 기록이라고도 하지만 아빠는 여기서 안시성주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다고 봐.

당 태종이 나타나기만 하면 당나라 말로 욕설을 퍼부었던 안시성 수비군, 그들이 창칼을 내리고 모습을 감춘 건 말머리를 돌린 군대를 새삼 자극하지 않으려는 지혜였을 테니까. 또 성주 혼자 성루에 올라 인사한 것 역시 승자의 자만에 취하지 않고, 물러가는 전쟁의 그림자를 담담하게 배웅할 줄 알았던 무장(武將)의 국량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23년 후인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고구려 땅 곳곳에는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 성들이 남아 있었어. 안시성 역시 그중 하나였단다. 고구려 멸망 뒤로도 3년을 버티던 안시성은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에 의해 기어코 무너지고 말았지. 당 태종과 싸웠던 안시성주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의 마지막 소회는 무엇이었을까? 이름 석 자, 말 한마디 제대로 된 기록에 남기지 않은 무장, 그러나 우리 역사상 최대의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군 안시성주가 사뭇 궁금해지는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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