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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안나는 왜 북한에 갔을까

2018년 09월 21일(금) 제575호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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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레일리아 영화감독이 북한의 선전영화 연출 기법으로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를 만들었다. 안나 감독은 2012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영화인들을 만났다.

<The cinema and directing(영화와 연출)>.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이 67쪽짜리 얇은 책 한 권을 보여주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영화 연출 기법에 대해 쓴 지침서로, 1987년 출간된 책이다. 2010년 기자 친구에게 선물받았다. 그가 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선 때마침 대규모 탄층 가스 채굴이 시작되고 있었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옆에서도 시추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영화감독인 안나는 어떻게 이걸 멈출 수 있을까 궁리하다 책을 떠올렸다. 북한의 선전영화 연출 기법을 가져와 강력한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먼저, 북한에 가기로 했다.

9월10일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언론 시사회가 끝난 뒤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중 수첩에 무언가를 계속 적어 내려갔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돌아가면 신문에 글을 싣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의 반응을 다루는 글이다. 2013년 만들어진 영화의 정식 개봉은 한국이 처음이다. 미국의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긴 했지만 그로서는 북한과 맞닿은 한국 관객의 반응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만큼 개봉이 반가웠다.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6·12 싱가포르 회담 덕에 개봉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북한의 영화업계가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가족과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선전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안나가 평양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북한의 유명한 영화감독, 배우 등을 만나 영화제작 기법을 배우고 시드니에 돌아와 ‘평양 스타일’의 단편영화를 만든다. 영화 제목은 <Gardener (정원사)>. 배급사는 영화의 장르를 ‘혁명적 코믹 어드벤처’라고 했는데 과장만은 아니다. 코믹하고 재기 발랄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북한의 영화판을 희화하는 건가 싶다가도, 감독의 배우려는 태도가 진지해 웃음기를 거둬들이게 된다.

북한을 방문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다른 기자들처럼 선글라스에 몰래 카메라를 넣어 촬영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식적인 촬영을 하려면 허가가 필요했다. 북한 대사관에 편지를 보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알게 된 브로커는 7만 유로(약 9100만원)를 요구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여행 사업을 하는 이와 연락이 닿았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그는 1년에 스무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데다 영화업계에 친구들이 많았다. ‘대기하는 줄이 길다’는 답이 돌아왔다.

1년 뒤 다시 연락해 김정일 위원장의 영화 지침서대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전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오히려 신선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2012년 6월, 작은 캠코더 하나만 들고 북한으로 향했다. 북한 측은 그의 의도가 진심인지 궁금해했다. 관계자와 소주로 여러 차례 건배를 하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통용되는 농담을 곁들였다. <정원사>의 시놉시스를 전하고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 그때 북한 영화 25편을 가지고 시드니에 돌아왔다. 2012년 9월 다시 방문해 3주 동안 촬영을 했다.

평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자본주의에서 흔한 ‘백색소음(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잡음 등)’이 들리지 않아 신기했다. 여성의 속옷 광고 등에 둘러싸여 있다가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파스텔톤 포스터를 보니 신선했다. 물론 그 밑에 쓰인 한국어를 읽지 못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북한 영화인들은 ‘자본가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여성 노동자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시드니의 실정을 듣고 공감해주었다. 지도자가 왜 그런 ‘악한’ 판단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한층 진보된 기술을 가진 서양 감독이 와서 고개를 숙이니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독포레스트 제공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오른쪽)이 북한 영화 관계자와 촬영 내용을 상의하고 있다.

“김정일은 프로파간다에 뛰어난 인물”

북한 영화계의 원로인 박정주 감독은 그를 북한 최대 규모의 세트장이 있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로 안내했다. 총면적 100만㎡(약 30만2500평)에 조선 시대와 일본 거리 등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의 서울은 술집과 안마시술소가 너무 많았다. 70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한 박 감독은 북한식 연기 지도를 보여주었다. 배우에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게 하고,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촬영장 주위를 뛰게 했다. 연기는 몸에서 나오는 거라는 철학에서였다.

실제로 안나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단편영화를 찍을 때도 배우들에게 신체 훈련을 시켰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북한에서 선전영화 제작 기법을 배우는 장면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걸 적용하는 내용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채워진다. 북한 스타일로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미쳤느냐고 물었다.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라, 선전영화를 진정성 있게 현실화하고 싶었던 감독은 방법을 고수했다.

안나 감독이 보기에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의 장례식까지 연출할 정도로 프로파간다에 뛰어난 인물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오페라 등에 관한 책도 썼다. 안나는 박사 과정에서 다큐멘터리와 프로파간다의 관계에 대해 공부하는 등 관심이 많았다. 김 위원장의 저서가 그럴듯한 이론가들의 이야기를 베낀 게 아닌가 하며 선물받은 <영화와 연출>을 읽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연출가가 국민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자본주의 타파를 부르짖지만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나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흥미로웠다. 김정일 체제 아래 만들어진 영화를 찾아 보다가 북한 영화에 매료되었다. 영화의 메시지는 모두 똑같았다. ‘나라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 로맨틱 코미디도 나라 사랑을 먼저 강조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선전영화의 현대화를 과업으로 삼고 할리우드 기법을 도입해 1970~1980년대 북한 영화의 전성기를 이뤄냈다. 안나 감독은 “북한의 영화업계가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안나 감독은 평양에서 기대 이상으로 많은 영화인들을 만났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에 능숙한 그는 박정주 감독과 일본어로 대화했다. 결혼 생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박 감독은 영화 인생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산에 오르는 것과 비슷해 스스로를 챙기지 못하면 정상에 오르기 어렵다고 했다. 개인사로 감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안나 감독을 다독여주기도 했다. 북한의 올리버 스톤이라 불리는 리관암 감독은 그의 스릴러 영화에 안나를 출연시키기도 한다. 북한에 거주하는 ‘악역 전문’ 외국인 배우의 얼굴도 등장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아꼈다고 알려진 윤수경과 리경희 배우를 비롯해 시나리오 작가 리희찬과 작곡가 배용삼도 나온다. 배용삼 작곡가는 안나의 단편영화를 위해 직접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 원로 영화인들이었다.

허가를 받았다 해도 촬영이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북한에 도착하자 여권을 압수당해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영화업계만 촬영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 편집할 때는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영화와 관련이 없는 지역은 찍지 못하게 했고, 특히 군인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걸 경계했다. 어디를 찍는지 앵글을 항상 통제했다.

북한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독재 정권과 영화는 사이가 좋았다. 선동에 이용하기 좋은 매체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예술가에 대한 대우도 좋은 편이었다. 독일이나 러시아로 유학을 보냈고 반응 좋은 영화를 만들면 집, 자동차, 명품시계를 지급했다. 물론 ‘김정은 체제’에도 유효한 얘기는 아니다. “깊이 물어보니 더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들도 대대적인 변화의 국면이라고 했다. 추측해보면 스스로 옛 시스템의 영광이 지나갔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인류애다. 북한을 흑백이 아니라, 컬러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회란 걸 말하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세상의 복잡한 뉘앙스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서양 미디어가 담고 있던 기존의 시선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이나 미래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평범한 일상, 영화 제작자들의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같은 영화인으로서 차이점보다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상영되었을 당시 언론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이용당한 영화라는 평가도 있었고, 정반대로 찬사도 있었다. 프로파간다에 대한 향수가 있는 러시아나 유럽에서 반응이 좋았다. 2015년 파주에서 열린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관객들이 웃고 울며 자기들끼리 응어리를 풀어냈다. 북한과 가까운 지역이고, 그만큼 끝나지 않은 이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영화는 무겁지 않다. 심각한 이슈를 다룰 때는 유머를 곁들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을 위대한 국가인 양 그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균형을 맞추기 어려웠는데 잘해냈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웃음의 대상이 되는 게 즐거운 경험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안나가 북한 영화인들에게 ‘혹시 기후변화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박정주 감독은 “우리가 달에서 온 줄 안다”라며 웃는다.

안나가 꾸준히 남북관계에 관심을 가진 건 아버지 덕분이다. 그의 아버지는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주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로 있었다. 안나 감독 역시 일본에서 태어나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이란 등을 돌며 성장했다. 그는 외부인이지만 패러디가 아니라, 진정성 있게 현실을 담고 싶었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었을 때의 감동을 생각하면 한국과 북한의 관계도 기대가 된다. 독재국가라는 건 변함없지만 북한 사람들은 유머와 유연함을 보여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든 북한이든 모두 대중 선동의 피해자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가 질문을 던졌다. 영화를 통해 북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지, 통일 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싱가포르 회담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어렵지 않은 질문 같았지만 간단히 답하기 어려웠다. 감독의 질문은 진지하지만 영화는 자주 웃음을 유발한다. 달나라 사람이 아닌 동시대를 사는 이들에 관한 영화다. 외국 영화지만 꽤 많은 분량을, 자막 없이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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