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기다리던 친구가 돌아왔다.” 소개를 끝낸 선생님이 자리에 들어가 앉으라고 했지만, 학생은 그러지 않았다. 교단에 서서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께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수화로 짐작되는 동작이 천천히 이어지는 동안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뭐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원래 말을 못하는 아이인가?

궁금한 것을 궁금한 채로 남겨둔 짧은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영화는 얼마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여러분이, 기다리던, 친구. 선생님이 그 말을 입에 담기까지, 대체 이 친구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되짚어가는 것이다.

어느 날, 경민(전소니)이 사라졌다. 아마도 자살일 거라고, 사람들이 수군댔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친구가 있다고, 아이들은 수군댔다. 같은 학교 다니는 영희(전여빈)가 바로 그 친구라고, 이제는 경찰들도 수군댄다. 저마다 끼리끼리 수군대는 사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마치 처음부터 사실인 양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니까 영희. 어떤 식으로든 경민의 실종에 책임이 있(다고 모두가 믿)는 아이. 그가 주인공이다. 아까 교단에서 수화로 얘기하던 바로 그 학생이다.

친구들의 증언과 CCTV에 담긴 정황이 모두 영희를 지목한다. ‘경민이를 죽인 아이’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경민이가 죽기를 바란 아이’가 맞다고 한다. 영희가 최선을 다해 결백을 주장한다. 경민의 엄마(서영화)는 최선을 다해 영희를 의심한다. 필사적으로 서로의 죄를 묻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두 사람. 그 사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가장 나중으로 밀려나고 있다.

경민이는 왜 그랬을까? 왜 그런 마음을 먹었을까? 무엇이 그를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게 만들었을까? 남은 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에 아무도 손대지 않는다. 이 학교에서, 이 사회에서, 이 나라에서 ‘수군거림’과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는 순간 끝이니까. 마치 수건돌리기 게임을 위해 둘러앉은 사람들처럼, 내 등 뒤의 수군거림과 조리돌림을 얼른 다른 사람 등 뒤로 옮겨놓아야 살아남으니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수상작

그렇게 사건을 되짚어 다시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온 영화. “여러분이 기다리던 친구가 돌아왔다.” 이 대사는 이제 관객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번역된다. “여러분이 피하고 싶던 질문이 돌아왔다.” 누구 탓인가? 누가 가장 죄 많은 사람인가?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은 죄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다 끝난 일”들이란, 정말로 다 끝난 게 맞나?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 자리를 놓고 지금 내 마음속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함께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는 영화 〈죄 많은 소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신인 감독 작품이 겨루는 유일한 경쟁부문의 제일 큰 상(뉴커런츠상)을 받았다.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영희를 연기해낸 전여빈 배우에게는 ‘올해의 배우상’이 돌아갔다. 〈곡성〉 연출부 출신 김의석 감독의 아주 단단한 장편 데뷔작. 지금 가장 죄 많은 관객은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관객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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