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꽃이 필 때다. 라오스 남동부 아타프 주에서는 9월 중순 무렵부터 벼에 누르스름한 꽃이 좁쌀처럼 돋아난다. 이곳 농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벼가 임신을 한 것”이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는 ‘랍관카우’ 의식을 치른다. 쌀알이 영글기를 기원하며 바나나 나무로 작은 바구니를 만들어 술과 꽃, 과일을 담아 논에 바친다. 비앙 씨(68)도 매년 이 소박한 전통을 따랐다. 아타프 주 사남사이 군 힌랏 마을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비앙 씨는 논 20마지기에 벼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올해 그가 심은 벼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시사IN 이명익댐 사고의 최대 피해 지역인 타생짠 마을.
100여 가구가 살았던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다.

9월20일 비앙 씨를 만난 곳은 힌랏에서 15㎞ 떨어진 사남사이 중·고등학교 대피소였다. 100평(330㎡)이 채 안 되는 허름한 목조 건물에 ‘힌랏 3’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비앙 씨를 비롯해 힌랏의 50가구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지난 7월23일(현지 시각) 홍수 경보가 마을에 전해졌을 때도 논에 벼를 심고 있던 비앙 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기가 한창인 7월이면 마을 동쪽으로 흐르는 세피안 강은 수시로 범람하곤 했다. 강물이 불어나 집안에 물이 찰 정도가 되면 주민들은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고지대로 옮겨놓은 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그 누구도 해발 1100m 볼라벤 고원에서 댐이 무너졌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힌랏 주민 대부분은 그곳에 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홍수는 삽시간에 마을과 논밭을 집어삼켰다. 지붕까지 물이 차올랐다. 댐이 무너지며 쏟아진 물 5억t은 세피안 강 하류에 있는 19개 마을을 휩쓸었다. 힌랏은 타생짠과 함께 물이 첫 번째로 들이닥친 마을이었다. 그날 이후 비앙 씨의 여동생과 조카는 실종 상태다.

 


위 양(16)은 지붕을 타고 급류에 휩쓸려가던 중 보트를 탄 구조대를 만나 목숨을 건졌다. 취재진이 “사바이디(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두 손을 모은 위 양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며 “사바이디”라고 수줍게 답했다. 요즘 그는 구호물품으로 받은 교복을 입고 ‘힌랏 3’ 바로 옆에 있는 학교로 등교한다. 그가 속한 4학년 4반 학생 48명 중 5명이 힌랏 출신이다. 라오스 정부가 운영하는 대피소로도 사용되는 사남사이 중·고등학교는 원래 개학날인 9월1일을 지나 9월 중순에서야 개강했다. 겨우 4학년(중학교 3학년)과 7학년(고등학교 3학년) 수업만 열렸다. 학교 대부분을 대피소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댐 사고 이후 두 달이 지났지만 사남사이 군 소재 임시 대피소 5곳에는 여전히 이재민 4563명이 머무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사남사이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힌랏 마을 주민들.
왼쪽 첫 번째가 비앙 씨, 세 번째가 위 양이다.

7월23일 붕괴된 댐의 공식 명칭은 ‘새들(Saddle) D’다. 세피안·세남노이 댐에 딸린 보조댐 5개 중 하나이다. 이 댐 건설을 한국 기업 SK건설이 맡았다. 2012년 이 댐 공사를 수주한 회사는 ‘PNPC’. 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 타이 라차부리 전력, 라오스 국영 LHSE의 합작회사다. PNPC의 최대 주주는 SK건설로 서부발전 지분(25%)까지 합치면 한국 기업이 전체 지분의 51%를 보유하고 있다. 투자금 10억 달러(약 1조1150억원), 공사대금은 7800억원인 초대형 사업이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한국 수출입은행은 유상 원조인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7000만 달러를 라오스 정부에 공여했다. 한국 기업이 주도하고 한국 정부가 지원한 해외 건설 현장에서 대규모 인명 피해를 동반한 붕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고 직후, 재난 상황과 원인을 다룬 뉴스가 쏟아졌지만 언론의 관심은 이내 사그라졌다. 이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던 외신에서도 이제는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시사IN〉은 9월17일부터 9월27일까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과 남동부의 참파사크 주·아타프 주의 사고 현장 및 수해 지역을 취재했다.

 

ⓒ시사IN 이명익세피안·세남노이 댐의 보조댐 ‘새들 D’.
중심부가 완전히 파괴됐다.

9월17일 취재진은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의 와타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붕괴 현장이 있는 아타프·참파사크 주는 비엔티안에서 525㎞ 떨어져 있다. 라오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9월19일 팍세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누런색 메콩 강이 흐르고 있었다. 수천 년간 이 지역 주민들의 젖줄이었던 ‘어머니의 강’은 이제 라오스 최대 수출품을 생산하는 동력이다. ‘동남아시아의 배터리’를 표방한 라오스 정부는 2000년대 중반부터 메콩 강과 지류에 대대적으로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전력을 대량으로 생산한 뒤 인근 국가에 수출하겠다는 전략이다.

 

ⓒ김연희·최예린 기자

 

 

 

 

 

참파사크 주의 주도인 팍세 동쪽으로 세피안·세남노이 댐이 위치한 볼라벤 고원이 자리 잡고 있다. 취재진은 팍세 공항에서 사륜구동 픽업트럭인 ‘포드 레인저’를 빌려 2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밀림 사이로 슬레이트 가건물 단지가 나타났다. SK건설이 지은 ‘공사 캠프’다. 댐 건설이 한창일 때는 라오스인을 비롯해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에서 온 노동자 2000여 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지금은 노동자 400명 정도가 볼라벤 고원 아래에 수력발전소를 짓고 있다.

 

 

ⓒ김연희·최예린 기자

 


현장은 처참하고 사상자 수는 정확지 않아

 

 

 

 

다시 차를 몰아 사고 현장인 새들 D로 향했다. 보조댐인 새들 D는 세남노이 댐이 조성한 저수지의 동쪽 끝 계곡에서 물막이 구실을 했다(아래 인포그래픽 참조). 취재진은 붕괴 현장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총 길이 770m 중 30m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400m가량이 파손돼 있었다. 당초 댐이 있던 자리로 흙탕물이 세차게 흘렀다. 무너지며 드러난 단면으로 댐 내부를 메운 붉은 흙이 눈에 들어왔다. 댐 근처에서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이 토질 검사를 위해 드릴로 땅을 뚫고 있었다. 라오스 정부는 사고 직후 원인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했다.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라오스 정부 관계자들은 천막 아래에서 현장을 감독했다.

 

ⓒ김연희·최예린 기자

 

 

 

사고 직후 붕괴 원인을 둘러싸고 자연재해, 부실 공사 등 여러 뉴스가 쏟아졌다. 당시 캄마니 인티라스 에너지광산부 장관은 RFA(Radio Free Asia)와의 인터뷰에서 “댐 공사가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여기에 예상치 못했던 폭우가 내리면서 보조댐이 붕괴된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SK건설은 당초 사고 원인으로 하루 438㎜가 내린 기록적인 폭우를 지목했다. SK건설은 라오스 정부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SK건설 사무실의 굳게 닫힌 문 기사 참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5월에 시작되는 라오스의 우기는 9월까지 계속된다.

 

ⓒ시사IN 이명익드론을 띄워 세남노이 댐 인근 전경을 촬영했다.
만수가 되면 사진 중간 아래에 있는 갈고리 모양 물길(여수로)로 물이 빠져나가는 구조이다.

세남노이 댐은 새들 D에서 5㎞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댐 3개(세남노이·세피안·후웨이막찬)와 보조댐 5개로 이루어진 세피안·세남노이 수력발전소에서 본댐에 해당하는 세남노이 댐은 길이 1.6㎞, 높이 73.7m로 압도적인 규모를 뽐낸다. 댐 전체 저수량 10.7억t 중 10.3억t을 세남노이 댐이 가두고 있다. 볼라벤 고원을 흐르는 메콩 강 지류를 막아 조성한 인공 저수지는 13.5㎞ 길이 지하 터널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지하 터널을 통과한 담수는 볼라벤 고원 아래 남동쪽에 위치한 수력발전소로 떨어지며 41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 상업 운전은 2019년 2월 가동될 예정이었다.

 

새들 D가 무너지며 남서쪽으로 흘러넘친 물 5억t은 세피안 강을 휩쓸고 내려가 하류 지역 마을을 초토화했다. 9월19일 라오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댐 사고로 인해 40명이 죽고 32명이 실종됐으며, 대피자는 7095명이고 피해 주민은 1만3067명이다. 라오스 정부가 사고 직후 집계한 사망자나 실종자에 비해 줄어든 수치이다. 라오스 정부의 인구통계 시스템은 전반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9월21일 취재진은 사남사이 군청을 찾았다. 군청 담당자에게 수해 마을 인구통계 자료를 받았다. 군청이 취재진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사고 후 오히려 전체 인구가 585명이 더 늘어났다. 그래서 일부 국제 NGO 활동가는 국책사업으로 ‘동남아시아의 배터리’ 전략을 택한 라오스 정부가 사상자 수를 축소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세남노이 댐과 새들 D로 가는 길목 곳곳에 검문소가 세워져 있었다. 라오스 정부가 사고 지역에 언론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과 달리, 사고 현장을 처음 방문한 9월19일 취재진은 별다른 제재 없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검문소에는 SK건설 직원과 라오스 군인이 상주했다. 이날 취재진은 붕괴 현장인 새들 D와 세남노이 댐 등을 취재했다. 9월21일부터 SK 현장 관계자 등을 상대로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이 취재 뒤 9월24일 사고 현장을 재방문했을 때는 분위기가 첫 방문 때와 180° 바뀌었다. 새들 D에서 현장에 있던 SK 직원과 라오스 관리가 접근을 막았다. 이날 SK 공사 캠프에서 만난 한국인 직원은 “8월 초부터 라오스 정부가 이 지역을 출입 제한구역으로 설정했다”라고 말했다.

SK건설이 마련한 사남사이 임시대피소는 슬레이트로 지은 가건물이다. 약 150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 가구마다 발코니가 딸린 4평(약 13.2㎡)짜리 방 한 칸이 주어진다. SK건설은 1000가구가 살 수 있는 규모의 임시 대피소를 추가로 건설 중이다. SK건설은 구호 및 복구 작업을 위해 직원 20명을 2주씩 돌아가며 파견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SK건설 관계자는 “추가 대피소가 마무리되면 복구 작업도 어느 정도 정리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캄브이 씨(50)는 아내 페써머 씨(40), 세 아들과 함께 사남사이 임시 대피소에서 지낸다. 아내와 함께 발코니에 앉아 있던 캄브이 씨는 “방이 좀 덥긴 하지만 긴급 구호용 텐트보다는 지낼 만하다”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이 살았던 반마이는 라오스 정부가 ‘완전 파괴’로 분류한 6개 마을(타생짠·힌랏·반마이·타힌·싸멍·테냐이) 가운데 하나다. 댐 사고로 반마이 마을 사람 8명이 실종되고 3명이 죽었다. 홍수가 난 7월23일, 캄브이 씨 가족은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

 

ⓒ시사IN 이명익사남사이 대피소의 모습.
최대 피해 지역 마을 중 하나인 반마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캄브이 씨 가족은 라오스 정부가 한 달에 한 번 배급하는 쌀 20㎏과 1인당 하루 5000키프(약 660원)씩 주는 현금에 기대 생활하고 있다. 팍세와 비엔티안에 있는 친척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도 어려운 금액이다. 캄브이 씨는 취재진에게 “한국 정부가 라오스 정부에게 수해 성금으로 3억 달러(약 3000억원)를 주었다는 소문을 들었다”라며 사실인지 물었다. 

한국 정부는 라오스 정부에 117만 달러(약 13억원) 상당의 구호를 제공했다. 이 중 50만 달러(약 5억6000만원)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SK건설은 지난 7월27일 주한 라오스 대사관을 찾은 최태원 회장이 구호금 1000만 달러(약 112억원)를 기탁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캄브이 씨는 “가족당 보상으로 최소한 1000달러(약 112만원)를 받아야 한다. 라오스 정부에 돈을 주면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한국 정부와 SK건설에 전해달라. 피해자들에게 직접 주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9월21일 오후 수해 마을 중 한 곳인 반마이로 향했다. 캄브이 씨의 아내 페써머 씨가 동행했다. 사남사이에서 반마이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는 진흙탕과 물웅덩이가 뒤섞여 있었다. 취재 차량이 위아래로 심하게 덜컹거렸다. 마을에 들어가 쓸 만한 세간을 챙겨 나오는 주민들이 반대 방향으로 지나갔다. 경운기를 타고 반마이 마을로 향하던 주민 9명이 취재 차량인 픽업트럭 짐칸으로 옮겨 탔다. 트럭이 물웅덩이를 지나갈 때마다 튀어 오른 흙탕물이 차창 앞 유리에 눌어 붙었다.

어느 언론사도 접근하지 못한 타생짠 마을

취재진이 반마이 마을에 도착해보니 199가구가 살던 마을에 멀쩡한 집은 하나도 없었다. 시멘트벽은 무너지고 지붕은 엿가락처럼 휘었다. 사고가 난 지 두 달이 되었지만 복구 작업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홍수가 나자 도망쳤다가 물이 빠진 뒤 돌아온 물소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초입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라오스 정부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재산 피해를 파악했다. 이날 조사는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에 한정됐다. 한 할아버지가 오토바이 번호판을 들고 나타났다. 진흙이 엉겨 붙어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흙 속에 파묻힌 오토바이를 꺼낼 수가 없어 겨우 번호판만 떼어왔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완전 파괴’로 분류되는 반마이 마을의 주민이 물이 빠진 마을에서 피해 물품을 싣고 빠져나오고 있다.

페써머 씨의 집은 마을 서쪽을 흐르는 세피안 강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었다. 마당을 덮었던 슬레이트 지붕이 찌그러진 채 폭삭 주저앉아 집 앞을 막았다. 페써머 씨는 이 집에 살며 식당을 운영했다. 마당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공간이었다. 메뉴는 쌀국수, 돼지고기 튀김, 닭고기 튀김, 야채볶음. 하루 쌀국수 50~60그릇, 고기 튀김 40~50봉투씩 팔았다. 폐허로 변한 이곳에서 손님이 북적이던 동네 식당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안에는 진흙이 가득 차 있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진흙 위로 보행기와 재봉틀, 보온병, 이불, 옷가지 등이 나뒹굴었다. 페써머 씨는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냉장고가 날아갔다”라고 말했다. 집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페써머 씨네 차인 도요타 픽업트럭을 발견했다. 차를 에워싼 진흙더미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남편 캄브이 씨는 팍세에서 산 채소를 이 차에 싣고 돌아와 반마이에서 팔았다. 페써머 씨는 자동차 백미러에 걸려 있던 부적을 챙겼다. 거북이 그림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행운과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의 부적이라고 했다.

9월22일 취재진은 돈복 대피소를 찾았다. 사남사이에서 10㎞ 떨어진 돈복 대피소에는 타생짠 마을 주민들이 머무르고 있다. 타생짠은 ‘완전 파괴’로 분류된 6개 마을 중에서도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다. 붕괴 사고 당시 물 5억t이 가장 먼저 덮친 곳이 바로 타생짠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잠겼다. 붕괴 사고 직후 취재에 나선 한국 언론을 비롯해 세계 어느 언론사도 이 마을에 접근하지 못했다.

 

ⓒ시사IN 이명익9월20일 SK건설이 지은 사남사이의 주민 대피소에서 SK에서 고용한 현지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돈복 대피소로 들어가는 길은 반마이로 가던 길보다 상태가 훨씬 더 나빴다. 취재 차량은 쓰러질 듯 양옆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산 아래로 난민촌을 연상케 하는 텐트촌이 나타났다. 돈복 대피소에 있는 타생짠 주민 419명은 대부분 긴급 구호용 텐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Australia Aid(오스트레일리아 구호)’ 로고가 찍힌 천막 안에서 어린이들이 라오스 음악을 틀어놓고 전통 춤을 췄다. 신기한 듯 취재진을 쳐다보던 아이들은 “사바이디”라는 인사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있던 주민 10여 명은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사고 이후에야 댐의 존재를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댐을 한국 기업이 지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SK건설이 마련한 임시 대피소에 있는 이재민들을 제외하고, 취재 중 만난 주민들 대부분이 ‘SK건설’이라는 이름은 물론 이번 사고와 한국 기업이 관련돼 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타생짠 마을은 대피소에서 3㎞ 거리에 있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드론을 띄우자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거대한 진흙더미가 지금도 마을로 향하는 진입로를 덮고 있는 탓에 주민 대다수는 사고 이후 한 번도 마을에 들어가지 못했다. 마을 이장 통손 씨(50)는 “언론에서 반마이 마을만 찍고 가버려 속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고로 아버지와 동생, 조카 한 명을 잃었다.

사륜구동 취재 차량으로는 타생짠에 접근할 수 없었다. 취재진은 경운기를 빌려 주민 5명과 함께 마을에 들어가기로 했다. 경운기를 타고 20분쯤 이동했을 때 일행 중 한 명인 캅 씨(30)가 멀리 서 있는 키 큰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사고 당일 캅 씨는 물을 피해 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배를 가진 이웃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가족 가운데 캅 씨와 아홉 살짜리 큰딸만 살아남았다. 아내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두 살과 세 살배기 두 아이는 실종 상태다. 캅씨는 나무를 보며 사고 당일을 떠올렸다. “앞뒤로 아이들 둘을 둘러메고, 필사적으로 살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물이 불어나 그 손을 놓쳐버렸다. 들쳐 업었던 한 아이도 실종됐다.” 캅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사IN 이명익타생짠 마을을 찾은 캅 씨는 이번 댐 사고로 아내와 두 살과 세 살배기 아이를 잃었다.

취재진과 주민들은 경운기를 타고 최대한 마을 가까이 가려 했다. 40분쯤 이동하자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진흙이 두껍게 쌓여 있어 경운기로도 지나갈 수 없는 길이 이어졌다. 취재진과 주민들은 경운기에서 내려 마을까지 이어진 진흙길을 걸었다. 진흙이 깊은 곳은 허벅지까지 빠졌다. 그렇게 걷기를 1시간20분, 취재진과 주민들은 타생짠에 도착했다. 진흙으로 뒤덮인 마을에는 파괴의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100여 가구가 살았던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다. 말라버린 시멘트 수로와 폐허가 된 집 4채만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언했다. 

다시 힘겹게 진흙길을 헤치며 마을을 빠져나와 경운기를 타고 대피소로 돌아가는 길. 볼라벤 고원 아래쪽으로는 벌목 작업이 한창이었다. 라오스 정부는 SK건설과 별개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재민들을 위해 사남사이 인근에 재정착 지구를 조성하고 있다. 나무를 모두 밀어낸 부지가 황량했다. 잔가지를 제거하기 위해 피운 불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 터전을 짓기 위해 지펴놓은 불씨가 떠난 이를 애도하는 향처럼 타들어갔다.

 

 

 

 

기자명 라오스 아타프·참파사크 주/ 글 김연희 기자, 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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