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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에 찬바람이 분다

2018년 10월 23일(화) 제579호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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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가을, 밀 파종에 나서는 농가가 크게 줄었다. 방치된 우리밀 재고는 전국적으로 1만8000t에 이른다. 2008년 이후 정부는 밀 자급률을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지만 판로는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을은 파종의 계절이다. 쌀 수확이 끝난 10월 중순쯤부터, 우리 농촌에서는 밀 씨앗을 뿌린다. 이맘때 뿌린 밀 씨앗은 겨울-봄을 지나고 이듬해 초여름 알곡을 맺는다. 올가을은 사정이 다르다. 밀 파종에 나서는 밀 농가가 크게 줄었다. 밀 농사를 지어봐야 내다 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에 한국우리밀농협이 있다. 국내 밀 수매 단체 중 가장 큰 이곳은 전국 밀 농가 2000여 곳과 계약재배를 한다. 농가에서 사들인 밀로 국수·만두·핫도그·마들렌 등을 만들어 팔고, 그 돈을 계약재배 농가에 지불한다.

지금 이곳 창고는 꽉 찼다. 2016~2017년 수확한 우리밀 6000여t이 재고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올해 수확한 밀의 경우 지역 농협 창고를 임차하거나, 그도 아니면 개별 농가 창고에 그냥 방치돼 있다. 이렇게 방치된 우리밀 재고가 전국적으로 1만8000t에 이른다. 지난해 1만5000t이었으나, 올해 더 늘었다. 이렇다 보니 올가을 밀 파종에 나서지 못하는 농가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몇 년 뒤에는 아예 밀 종자마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염려까지 나온다.
ⓒ한국우리밀농협 제공

2015년 11월14일 백남기 농민도 전남 보성에서 밀을 파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 자신의 밭에 밀 씨앗을 뿌렸다. 남쪽 끝이라 밀 파종 시기가 11월 초순쯤이다. 백남기 농민도 밀 농사꾼이었다. 1980년대부터 고향인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밀 농사를 지었다. 전국을 돌며 밀 종자를 모으고 주변에 밀 농사를 권했다. 국내에서 쌀 다음으로 많이 먹는 곡물이 밀이다. 우리밀 재배를 늘려야 한다는 게 백남기 농민의 생각이었다.

그가 쓰러진 뒤에도 밀밭은 후배들이 이어받아 수확했다. 2016년에도 2017년에도, 백남기 농민이 없었어도 밀은 살아남았다. 1만㎡(약 3000평) 땅에서 1t 정도 밀을 수확했다.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우리밀식품 대표)은 이 밀을 전량 수매해 지난해부터 ‘백남기 우리밀 세트’(냉면·쫄면·수제비 등)를 만들어 팔았다. 지난 추석 때 전남경찰청이 직원들에게 백남기 우리밀 세트 판매를 독려했다는 사실을 보수 언론이 걸고넘어지면서 새삼 백남기 농민 2주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강은 본부장은 “재고 문제로 국내 밀 농업이 휘청이고 있지만, 올가을에도 백남기 밀 파종을 하려 한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9월25일은 백남기 농민이 떠난 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를 추모하는 일은 올해도 계속됐지만 정작 그가 떠난 밀밭에는 찬바람만 분다. 백남기 농민이 지키려 했던 우리밀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주 멀리 갈 것도 없다. 하필이면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은 원래 우리 농촌의 주력 작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는 밀 재배가 흔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외국산 밀이 대규모로 수입되면서 ‘밀=수입산’이 공식처럼 되었다. 1982년 밀 수입이 자유화되고, 1984년 전두환 정부가 우리밀 수매를 중단한 뒤 근근이 이어오던 우리밀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다. 1970년 15%를 기록했던 밀 자급률(전체 식량 소비량에서 자국산 식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 0.05%까지 곤두박질쳤다. 이후 1990년대 백남기 농민이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을 맡는 등 우리밀 확산을 위해 노력했지만,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우리밀 살리기’는 사실 국내 농업의 주요 이슈가 아니었다.

2000년대 이후 기후변화가 세계 식량산업을 강타했다. 2006~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등 주요 밀 산지에 유례없는 가뭄이 닥치면서 국제 밀 가격이 급등했다. ‘애그플레이션(agflation: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농민운동 단체가 아닌 정부 당국자의 입에서 ‘식량 안보’라는 말도 나오던 때다.

그리고 2008년, 새로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애드벌룬을 띄웠다. 밀 자급률을 2015년까지 10%, 2020년에는 15%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발표해버린 것이다. 2008년 밀 자급률이 0.5%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목표치였다(35쪽 표 참조). 최소 20배 이상 우리밀 생산량을 늘려야 가능한 수치였다.
ⓒ한국우리밀농협 제공
6월17일 각지에서 수확된 우리밀이 트럭에 실려 광주광역시 광산구 한국우리밀농협 창고로 향하고 있다.

밀 자급률을 10~15%까지 끌어올린다는 정부 발표에 농촌은 반색했다. 계속되는 쌀값 폭락으로 힘겨워하던 농가는 밀 재배에 나서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정부가 식량 안보까지 들고 나온 마당에 어떻게든 ‘책임’을 져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됐다. 쌀 수확 뒤 가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2모작이 이루어졌다.

백남기 농민이 속해 있던 광주·전남 지역은 전국 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밀 재배에 앞장섰다. 밀 자급률도 점점 높아졌다. 2010년 1.7%, 2015년 1.2%, 2016년 1.8%를 기록했다. 2010년 무렵부터 ‘우리밀의 화려한 부활’ 같은 제목을 단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다 잘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문제는 판로였다. 밀은 100% 민간에서 소비하는 식량이다. 우리밀농협, 생협 등이 주된 소비처다. 정부 수매량은 ‘0’이다. 정부는 자급률 목표치만 발표했을 뿐, 판로 개척과 관련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가 ‘우리밀 1㎏ 먹기 운동’을 전개한 것이 정책이라면 정책이었다. 그렇게 밀 생산량은 늘어나는데, 판로는 열리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그러다 2년 전부터 남아도는 우리밀이 창고에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도 남아도는 우리밀이 문제가 되면서 농식품부가 일부 분량을 주정용으로 특별 처분했다. 올해 우리밀 재고 사태는 100% 예측 가능했다.

우리밀 자체가 가지는 문제점도 있다. 우선 수입산에 비해 값이 2~3배 비싸다. 하지만 이건 한계라기보다는 ‘조건’이다. 밀 자급률을 올리기로 했을 때부터 어떻게든 해결했어야 할 숙제다. 밀 자급률 15%를 기록하는 일본의 경우 수입 밀에 세금을 매겨 시장가격에서 자국산 밀과 가격 차이가 별로 없다. 사실상 소비자에게 세금이 부과된 꼴인데, 자국 밀 농업을 지키기 위한 일본 정부의 방책이었다. 농업계 일부에서 일본 사례를 들며 정책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다른 곡물과의 형평성 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우리밀 품종의 특성도 문제다. 농가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종은 ‘백중밀’이다. 수확량이 많아 자급률 올리기에 열을 올린 정부가 적극 보급했다. 하지만 글루텐 함량이 적어서 점성이 떨어져 빵이나 국수에 쓰기 적합하지 않다. 한때 몇몇 제과기업이 식품 안전을 내세워 ‘우리밀 마케팅’에 나서면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곧 시들었다. 농촌진흥청이 품종개량에 나서기는 했지만 새로운 종자가 농가에 보급되지는 못했다.

결국 지난 10년 동안 가격과 품종개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채, 우리 사회는 밀 산업 육성만 외쳐왔다. 정부 당국자든 농민이든, 어느 시점에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생산은 느는데 팔리지는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음을.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농민들은 자급률 목표치를 뻥튀기해 잘못된 신호를 준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시사IN 조남진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진헌극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공동대표, 김영규 GMO반대전국행동 조직위원장, 박웅두 정의당 농민위원장(왼쪽부터).

농민운동 인사들의 유례없는 단식 농성

문재인 정부도 별다르지 않다. 지난 2월 농식품부는 ‘2018∼2022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이라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서도 밀 자급률은 2022년까지 9.9%나 된다. 최근 수급 상황 등을 감안해서 ‘현실화’한 수치란다. 과거 정부의 10~15%보다는 낮지만, 여전히 1%대인 자급률에 비하면 턱없이 높다. 농식품부 담당자는 “목표치란 원래 높게 잡는 것이다”라고만 말했다. 정부의 과도한 목표치가 농가의 기대치를 높여 결과적으로 재고 문제가 터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농식품부의 ‘발전계획’에 우리밀 관련 대책이 있기는 하다. ‘안정적 판로 구축에 주력’ ‘정부 수매 수입량 조정 등 추가 수요 확보 노력 병행’ 따위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농식품부 담당자는 국회와 협의해서 정부가 수매하거나, 학교 및 군대 급식에 우리밀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아직 논의 중이다.

당장 창고에 보관 중인 우리밀 1만8000t을 어찌하느냐가 눈앞에 닥친 문제다. 그런데 뜻밖에 처리 비용이 그리 크지 않다. 비영리조직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송동흠 운영위원장의 추산에 따르면 195억원이면 해결 가능하다. 우리밀 재고를 넉넉잡아 2만t으로 봤을 때 40㎏짜리 가마니 50만 개 분량이다. 올해 밀 수매가가 가마니당 3만9000원이었으니, 약 195억원이면 재고 물량을 처분할 수 있다. 송동흠 운영위원장은 장갑차 몇 대 가격이면 해결할 수 있는 규모라고 주장한다.

지금 청와대 앞에서는 농민운동 인사들의 단식 농성이 진행 중이다. 진헌극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공동대표, 김영규 GMO반대전국행동 조직위원장, 유영훈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이사장, 채성석 전 동군산농협 조합장 등이 10월8일까지 한 달 동안 단식을 강행했고, 10월9일부터는 릴레이로 단식 농성을 이어간다. 농민운동 인사들의 청와대 앞 단식 농성은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다.

이들의 구호는 ‘농업 적폐 청산과 농정 대개혁’이다. 단식 농성에 어울리지 않는 무척 거창한 구호다. 의아하게도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없다. 오직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농업 문제가 워낙 쌓이고 쌓여 몇 가지 단기 처방으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통령 직속 특별위원회 구성 등을 통해 큰 틀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밀 재고 문제도 여러 산적한 숙제 가운데 하나다. 절박하나, 뚜렷한 해법을 찾을 수 없어서 거창한 구호를 내걸어야 하는 현실. 문재인 대통령은 조만간 이들과 면담을 갖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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