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해상자위대가 10월10~14일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국 해군 국제관함식 참가를 포기했다. 한국 정부가 욱일기(旭日旗) 게양 반대 뜻을 밝히자, 스스로 불참 뜻을 알려왔다. 일본 이와야 다케시 방위장관은 욱일기에 대해 “국제법상 군대 소속 함정이라고 표시하는 외부 표식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욱일기 게양을 고집하는 상황이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애초부터 국가원수 등이 자국의 군함을 검열하는 행사인 관함식에 왜 ‘군대(military force)’가 아닌 ‘자위대(self defense force)’의 함정이 초청되었느냐는 점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헌법에 그 존재가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헌법에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국제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전력의 보유는 물론 교전권조차 부정한다(제9조). 자위대는 헌법과 별개인 자위대법에 따라 구성된 조직이다. 그래서 아베 일본 총리는 군대를 둔 ‘보통국가’를 만들겠다고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다.

ⓒGoogle 갈무리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말레이시아 페낭 일본 해군기지에 입항한 독일 U보트 승무원 환영식 모습.
물론 그동안 한국과 미국은 자위대를 실재하는 ‘일본의 군대’로 간주해왔다. 예컨대 2016년 9월 미 공군 전략폭격기 2대가 괌의 앤더슨 기지를 이륙해 한반도 상공을 비행했을 당시, 항공자위대 쓰이키 기지 소속 전투기 2대가 호위하다 공해 상공에서 한국군 전투기에 이들을 인계했다. 지난해 3월에도 동중국해 주변 해역에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에 참가하는 미국 항공모함과 해상자위대 호위함이 공동 순항훈련을 실시하는가 하면, 같은 달 한반도 동쪽과 일본 북쪽 해역에서 세 나라의 이지스함이 전술 데이터 링크 시스템을 사용해 탄도미사일 정보 등을 공유하는 합동 군사훈련을 한 바 있다.

둘째, 일본은 이념을 표현하는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욱일기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서 아베 정권의 제2인자 아소 다로 부총리의 외조부 요시다 시게루가 총리에 재임 중이던 1950년 6월8일,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자. “도시와 농촌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법으로써, 저는 구(旧) 육·해군 하사관, 기초단체장, 대정익찬회 지부장 같은 다수의 졸병들이 다시 희망을 가지고 정상적이며 유익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추방으로부터 해제해주는 것이, 시의적절하고 유효하며, 또한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침략전쟁을 주도한 파시스트들이 정·관·재계 및 언론계의 요직에 다시 앉지 못하도록 연합군 총사령부가 실시한 ‘공직에 관한 취업금지·퇴직 등에 관한 칙령(공직추방령)’이 폐지되기 전이었지만 그의 발언은 거침없다. 이미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이 크게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 냉전체제의 급속한 확산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만 해도 미국은 중국을 동아시아의 군사거점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장제스가 장악했던 중국은 미국의 동맹국이었고 전후에도 군사 원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륙의 패권이 마오쩌둥에게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거기에 한반도의 전쟁이 미국의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 앞에서 케네스 로열 미국 육군장관은 급기야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교두보로 삼겠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AP Photo2012년 10월14일 욱일기를 매단 유다치 구축함에서 바라본 호위함 구라마 호.
이후 미국은 일본에 헌법 제9조의 개정을 요구했다. 또한 전범을 무조건 처벌한다는 방침도 뒤집었다. 국방장관 앞으로 보낸 로열의 각서(1948년 5월18일)에는 “방위를 위해 일본의 군비를 최종적으로 인정한다는 견지에서 일본 신헌법의 개정이 모색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1949년 11월 미군 합동참모본부의 공식 견해이다.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국가가 아니라 미국의 군사거점 국가가 되고, 종국에는 자국의 예산으로 군대까지 만들어 미국의 동맹국이 되라는 것이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1차로 진행된 28명의 심리만을 마치고 종료되었다. 그리고 1948년 12월23일, 도조 히데키 등 7명이 처형된 다음 날 기시 노부스케(아베의 외조부이자 정치적 아버지)를 비롯한 A급 전범 용의자 19명이 스가모 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인재’라는 이유에서였다.
자위대 창설에 재등장한 욱일기패전으로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도 바뀌었다. 직업군인 출신을 주축으로 창설된 경찰예비대는 미군으로부터 통상적인 경찰 활동에 필요한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무기를 제공받았고, 미군기지 내에서 군사훈련까지 받았다. 1953년 경찰예비대가 보안대로 개편되고 1년이 지나자, 일본군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계승하는 자위대 창설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당시 기장(旗章)의 개정이 추진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이 욱일기다.

원래 규슈 지역에서 일부 무가의 문장으로 쓰였던 욱일(旭日) 의장이 일본군의 군기에 사용된 것은 메이지 일왕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축하면서부터다. 1870년 병부성(이후의 육군성)이 ‘육군어국기(陸軍御國旗)’로 고안한 욱일기는 대원수에 오른 메이지 일왕이 근대적 육군 편제의 기간 부대인 연대(連隊)에 하사했다. 이후 욱일기는 ‘군기’로 명칭을 바꿨다가 해군에 의해 붉은색 원이 깃대 쪽으로 옮겨간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군함기’로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더불어 자취를 감췄다.

당시 일본 보안대는 새 기장 제정을 앞두고 각 부처에 연구를 의뢰했다. 물론 대세는 옛 군함기를 지지했다. 하지만 국내외에 대놓고 ‘군국주의 부활’을 어필하기는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도쿄 예술대학에 자문했는데, “부대의 깃발로서 옛 해군 군함기는 최상이었다. 국기와의 관련성, 색채의 단순·선명성 및 바다색과의 조화, 사기의 고양 등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안을 의뢰받은 화가 요나이 스이호도 “군함기는 황금분할에 따른 형상, 일장(日章)의 크기, 위치, 광선의 배치 등 실로 훌륭하여 더 이상의 도안을 생각해낼 수 없다”라며 목청을 높였다. 1954년 6월 초 보안청에서 열린 기장 제정 심의에서도 제국 해군과 동일한 깃발을 이용할지 여부에 논란이 집중되었다. 끝내 원안을 지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요시다 내각의 국무회의에서 제국 해군과 같은 규격의 자위함기(自衛艦旗)가 제정되었다. 스가모 구치소를 나온 기시 노부스케가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초대 간사장이 된 것은 바로 이듬해 일이다.

방위성이 공개해놓은 요시다의 욱일기에 대한 발언은 현 이와야 다케시 방위장관의 “(욱일기는) 외부 표식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일축시킨다. “세계에 이 깃발을 모르는 나라가 없다. 어느 바다에서도 일본의 선박임이 일목요연한 게 실로 훌륭하다. 옛 해군의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해양 국가 일본의 수호에 힘써주기 바란다.”

기자명 홍상현 (〈게이자이〉 한국 특파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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