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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침략 막아낸 ‘자유’의 힘

2018년 10월 30일(화) 제580호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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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3년 몽골군은 충주산성을 포위하며 70여 일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다. 방호별감 김윤후는 민병과 천민 위주의 고려군에게 소와 말을 나누어주고 노비 문서를 불살랐다.

어느 국사 교과서는 몽골의 고려 침략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몽골이 다시 침입해왔으나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냈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아빠는 개인적으로 이 서술에 찬성하는 편이 아니란다. 일단 최우는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게 아니라 최씨 정권의 유지를 위해 강화도에 들어앉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도피였다고 보는 거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켰다고 하지만 정부가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거쳐 이쪽의 모든 자원을 탈탈 털어 방어진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아서 산성으로 가든가 섬으로 가라”는 거였으니까.


ⓒ문화재청
충주성 전투를 기려 충북 충주시 종민동에 건립된 대몽항쟁 전승 기념탑.

1253년 몽골군은 5차 침입을 감행했어. 몽골의 공격 루트는 두 방향이었다. 서북 지역을 휩쓸고 내려오는 종래의 경로 외에 고려의 동북면을 넘어온 거지. 몽골군은 강원도, 경기도 내륙 지방을 쑥밭으로 만들었어. 철원이 잿더미가 됐고 강원도 춘천의 봉의산성도 격전 끝에 함락됐지. 그리고 몽골군은 오늘날 중부내륙고속국도가 뚫린 그 루트를 선택하여 남으로 내려오지. 춘천·철원 등이 함락됐다는 소문을 들은 양평과 천룡(충북 중원)의 백성과 군사들은 저항을 포기했어. 여느 제국도 마찬가지지만 몽골군도 항복한 나라의 군대를 ‘화살받이’ 부대로 활용하는 데 익숙했고 몽골군은 양평과 천룡성의 군대를 앞장세워 남하하게 돼. 그 군대를 지휘한 건 이현이라는 고려 사람인데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몽골에 붙어버린 자였어. 몽골군이 음력 8월에 쳐내려온 건 이현의 속삭임이 작용했어. “수도는 강화도에 있고 세금은 지방에서 나오니 추수 때 지방을 치시면 강화도가 낭패를 볼 겁니다.” 배신자치고 참으로 얄미운 배신자지.

몽골군의 다음 목적지는 충주였어. 이 충주성은 여러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지. 22년 전 몽골 1차 침입 당시 충주성이 몽골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양반들은 다 도망가고 노비와 평민들만 남아서 몽골군을 물리쳤어. 그런데 도망갔던 양반들이 돌아온 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단다. 양반님네들이 자기 집 은그릇 없어졌다고 몽골군을 물리친 노비들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거야. 몽골군을 이긴 천민과 노비들은 결국 정부군에게 진압당하고 말았지.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했어. 양반들은 일찌감치 보따리 싸서 남한강을 타고 영월, 정선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거나 새재 넘어 경상도로 피했지. 남은 건 또 오갈 데 없는 노비와 천민들 중심의 민병들. 그런데 그 지휘관 역시 사연이 많은 인물이었어. 바로 20여 년 전 몽골군의 2차 침입 때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였던 김윤후가 충주에 와 있었던 거야. 당시 살리타가 죽음을 당한 처인성은 원래 처인부곡이라는 천민들의 주거지였고 성이라고 해봐야 축구장보다도 좁은 토성이었어. 김윤후는 그 천민들을 데리고 농성을 준비하다가 살리타라는 대어를 낚았던 거지. 김윤후는 상과 벼슬을 내리려는 조정에 대고 이렇게 얘기해. “제가 아닙니다. 저는 살리타를 죽일 때 활을 든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공이 없는데 상을 받겠습니까.”

몽골의 2차·5차 침입을 막아낸 김윤후의 초상화.
이는 김윤후의 겸손한 성품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가 공을 돌리고 싶은 대상이 따로 있었음을 의미해. 바로 처인부곡의 천민들. 처인성 전투 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된다. 천민들이 양민이 됐다는 얘기야. 처인부곡에서는 부락이 생긴 이래 최대의 잔치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러 1253년, 김윤후는 충주성의 방호별감이 됐고 또 한번 천민들을 이끌고 몽골군의 대군과 고려인 배신자와 맞서고 있었던 거야.

“공 앞에 귀천이 없다”


이미 충주는 고립된 성이었어. 심지어 경상도 성주의 유력자가 소백산맥을 넘어 몽골군에 투항하고 있으니 이미 충주 주변은 몽골군의 세력권이었다고 봐야지. 더구나 충주 천민들은 20여 년 전 싸워 이긴 뒤에 도둑으로 몰리고 여기에 항거하다가 관군의 칼에 목이 달아났던 아버지, 아저씨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지 않았겠어? 하지만 그들을 묶어세울 수 있었던 건 역시 처인부곡의 종결자, 김윤후의 이름이었을 거야. 1253년 10월, 몽골군이 충주산성을 포위하고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면서 70여 일에 걸친 공방전이 시작된다.

귀주성 전투 때처럼 정규군이 주력이 아니었고 민병과 천민 위주의 고려군이었지만 역시 몽골군이 혀를 내두를 만큼 악착같이 싸워. 기나긴 싸움은 점차 고려군의 힘을 소진시켰지. 몽골군이 성벽에 올라서는 일이 잦아지고 화살과 돌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어. 아마 무엇보다 괴로운 건 밖에서 몽골의 앞잡이가 된 고려인 동포들의 비아냥이었을 거야. “이 천민들아. 나라가 너희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싸운다고 상이나 줄 거 같아? 20여 년 전 일 잊었어?” 정신없이 활을 쏘고 넘어온 적병을 도끼로 후려갈기다가도 충주성 사람들은 “왜 내가 싸우고 있지?” 하는 질문에 홀연 가슴을 찔린 채 주저앉았을지도 몰라. 외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고도 도둑 누명을 쓰고 죽어간 아버지, 아저씨들의 기억도 생생했을 테고.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어느 날 김윤후는 성 안의 천민과 노비들을 불러 모았어. 퀭한 눈, 풀려버린 다리, 늘어진 어깨의 민병들. 그런데 병사들이 뭔가를 잔뜩 들고 나왔을 때 천민들, 특히 노비들의 눈이 커졌지. 그건 노비 문서였어. 발목을 잡아챈 족쇄처럼 자신들의 부모와 자신과 자식의 이름과 인생을 결박한 문서.

김윤후는 외친다. “만일 힘을 다하여 싸워 이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관작을 줄 것이다.” 그리고 노비 문서에 불을 질러버렸어. “너희는 오늘부로 양민이다. 문하시중도, 병마사도 될 수 있는 양민이다.” 이렇게 김윤후는 외쳤을 테지만 그 외침은 노비들의 비명 같은 함성에 묻혀버렸을 거야. 김윤후의 호령은 계속됐다. “저 소와 말들을 보아라. 공(功)대로 나누어주겠다. 공 앞에 귀천이 없다.” 이제 함성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김윤후는 운명에 귀속된 인간들이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어떤 힘을 내고 어떤 힘을 얻는지 알고 있었던 거야.

굳게 닫힌 충주성문이 열렸다. 맹공을 퍼붓다가 지쳐 있던 몽골군들은 별안간 성에서 쏟아져 나온 고려의 민병들 앞에 기절초풍을 했지. “관청 소속 노비들의 명부를 가져다 불살라버리고 또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나아갔다(<고려사> 권 103, 김윤후 열전).” 김윤후가 천민들에게 제공한 건 신분의 해방이면서 곧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였어.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과 전쟁에서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확실히 아는 것이었단다. 지치고 굶주리고 하다못해 내가 죽을 것 같아도 왜 싸워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었단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권리라 할 ‘자유’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어. 충주성 전투는 그 빛나는 예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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