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전부 다 알 필요도 없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이런 책을 만날 때면 괜히 투정을 부리게 된다. 이렇게 좋은 작품과 대단한 작가를 지금까지 몰랐다니. ‘헛살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아닐까. 이내 생각을 고쳐본다.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야’라고.

타임슬립은 SF 장르의 클리셰(흔히 쓰이는 소재나 이야기의 흐름)다. 새로울 것 없다는 소리다. 타임슬립물의 주인공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미끄러진다. 주인공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흑인’ ‘여성’이고, 그가 향한 곳이 아직 노예제가 존재하는 미국 남부라면?

소설 〈킨〉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주인공 다나는 이삿짐 정리를 하던 중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잠시 후 메릴랜드 주의 숲속에서 눈을 뜬다. 호수에 빠진 소년을 발견하고 구조하면서도 다나는 자신이 1976년에서 1815년으로 거슬러왔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단순 현기증이나 착시인 줄 알았던 일은 반복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도 점점 길어진다. 결국 다나는 살기 위해 ‘노예의 삶’을 익힌다.

〈킨〉옥타비아 버틀러 지음이수현 옮김비채 펴냄
저자는 다나가 경험한 폭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다나가 얼마나 분투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음의 풍경이 변하는 모습은 약자가 저항 대신 순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드러낸다. 그 덕분에 소설은 ‘야만’을 보여주면서도 증오 위에 서 있지 않는다. 시대와 사람에 대한 애증을 이만큼 강렬하고 우아하게 펼쳐놓는 작품을 나는 이전에 만나본 적 없다.

단편집 〈블러드 차일드〉도 놓치지 말자. 특히 책 말미에 실린 두 편의 자전적 에세이(‘긍정적인 집착’ ‘푸로르 스크리벤디’)는 저자와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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