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물론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은 동일하다. 하지만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 아니 온종일 할 수 있는 일을 따지라면 인도는 한국보다 몇 배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이틀째 누워 있는 중이다. 기차번호 12626 케랄라 익스프레스(Kerala Express)는 50시간째 인도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다. 돈을 더 주더라도 비행기를 탈걸. 두 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몇만 원 아낀다고 이틀째 고생 중이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사흘째 아침에 도착해야 하건만 이미 시간은 사흘째 정오를 가리키고 있다.

델리에서 출발할 때 분명히 파카를 입었는데, 하룻밤을 잘 때마다 옷을 한 벌씩 벗기 시작해 지금은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다. 여름이냐고? 아니다. 지난 2월 초 나는 북쪽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3000㎞를 내려왔다. 북위 28°에서 시작해 지금은 8°. 굳이 이 고생을 하며 인도 최남단 케랄라 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인도의 남쪽 가장자리, 서해안을 끼고 길쭉하게 늘어진 이 동네를 사람들은 ‘신의 땅(God’s own country)’이라고 표현한다.

ⓒ전명윤 제공케랄라의 동쪽으로는 거대한 산맥 닐기리가 버티고 있다. 닐기리 산맥에서 발원한 38개의 강은 거대한 5개의 호수와 만난다.


객관적으로 케랄라에 특별한 구석은 없다. 인도의 29개 주 가운데 땅 크기는 22위, 인구는 13번째로 많다. 쉽게 말해 인도 평균치고도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다. “어째서 여기가 신의 땅이지?” 처음 케랄라를 방문했을 때 내 첫마디였다. 1999년 세기말을 앞두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특집호(Collector’s Edition)를 냈다. 당신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50곳을 추천했는데, 그중에는 하나뿐인 지상낙원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었다. 케랄라는 하나뿐인 낙원이라는 카테고리에 등재됐다. 당시 꽤 많은 외신이 이 소식을 주목했는데, 정작 케랄라 사람들은 심드렁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뭔지는 몰라도 그런 데 등재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여기는 케랄란데.” 당시 선정에서 가장 파격적이었던 것은 섬이나 해변 등 특정 지점이 아닌 주 전체가 ‘통째로’ 등재됐다는 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 케랄라의 코발람 해변뿐이었다.

신의 땅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데는 케랄라 여행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케랄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색은 녹색, 그리고 하늘과 물의 푸른색이다. 단 두 가지 색은 콘트라스트에 따라 수십 가지로 변화한다. 색의 단조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 이런 엄청난 녹음 사이로 케랄라의 서쪽은 아라비아 해가 펼쳐져 있고, 동쪽은 거대한 산맥 닐기리가 버티고 있다. 일단 바다와 산이 있다면 휴양지로서 갖춰야 할 ABC는 갖춘 셈이다. 여기에 케랄라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내해(Back Water)의 존재다. 케랄라엔 닐기리 산맥에서 발원한 38개의 강이 있는데, 이 강들은 거대한 5개의 호수와 만난다. 강과 호수는 수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어떤 구간은 폭이 2m 될까 말까 한 가녀린 육지로 바다와 내해가 분리되었다. 작은 사구 너머로 바다가 일렁이는 모습은 장관이다.

케랄라 사람들은 이 수로를 따라 물류를 운송했다. 마치 뱀처럼 좁은 수로가 이어지다 대해가 아닐까 싶은 넓은 석호(潟湖)가 연결되고 호수는 다시 강으로 이어진다. 민물도 짠물도 아닌 이 생태계는 케랄라의 자연에 풍요로움을 더했고, 현재는 바다와 산을 뛰어넘는 가장 유명한 관광자원이 됐다.

 

ⓒ전명윤 제공아라비아 해가 펼쳐져 있는 케랄라 주를 199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특집호에서 ‘하나뿐인 지상낙원’으로 선정했다.


자연이 아름다운 곳을 찾으라면 굳이 케랄라가 아니어도 된다. 케랄라는 이 자연의 토대 아래 독특한 문화적 기반을 만들었다. 케랄라의 예전 이름은 말라바(Malabar). 대항해 시대 케랄라는 고대로부터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후추 산지다. 말라바 후추의 명성은 지금도 여전해 최고급 호텔에서는 언제나 테이블 후추가 말라바산임을 강조한다(일본 KOEI 사에서 만든 게임 〈대항해 시대〉를 해본 이라면 말라바를 듣는 순간 후추를 떠올리게 된다).

인도라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폐쇄적이다. 아주 드문 몇몇 시기를 제외하면 제국을 수립한 상황에서도 식민지 개척에 관심이 없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히말라야, 동쪽은 밀림이니 자연에 의한 쇄국이 가능했다. 오죽하면 바다를 건너면 카스트를 잃는다는 믿음이 있었고, 간디조차 유학을 앞두고 그런 두려움에 휩싸였을까. 심지어 라자스탄 주의 어떤 왕은 영국 황제 대관식에 가기 위해 거대한 은항아리를 만들어 갠지스 강물을 담아 갔다. 그는 수십 일간의 여행 내내 그 물만 마셨다고 한다.

케랄라는 이런 일반적인 인도의 모습에서 꽤 비켜나 있다. 예전부터 말라바의 후추와 향신료를 찾아 나서는 아라비아 상인들과 조우했고 그들과 부대끼며 국제적인 감각을 익혀나갔다. 케랄라의 명성은 저 멀리 카르타고, 로마, 유대인에게도 알려졌다. 쇄국정책으로 유명한 중국의 명 제국도 초기에는 개방적이었는데, 황제 영락제는 푸젠성 출신의 환관 정화에게 탐사 여행을 명령했다.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거대한 정화의 함대는 아프리카 동해안, 오늘날의 모가디슈까지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화가 들른 인도 땅이 바로 케랄라였다.

콜럼버스가 그토록 가려 했던,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가마가 가려 했던 인도란 바로 향신료의 천국 말라바였다. 어쩌면 유럽인들에게 인도는 그저 케랄라였을지 모른다. 케랄라 중부의 항구도시 코치에는 유대인 마을도 있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기원전 587년 유대왕국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했을 때 인도까지 흘러들어온 난민의 후예라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인도 유일의 유대교 회당 시너고그에서 유대식 예배를 드린다.

신들의 땅을 유지한 사람들

종교 분쟁이 심한 오늘날 인도에서 케랄라가 안전한 곳으로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연스레 아랍의 이슬람 상인, 기독교인들과 교류하며 강제적 개종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힌두교 바깥의 종교를 접했고, 일부는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힌두교도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에서 케랄라 주만은 인구의 44%가 힌두교 바깥에 있다. 일방적이지 않은 인구 구성은 이 땅에 토론과 존중이라는 전통을 숨 쉬게 했다. 누구든 일방적으로 차별할 수 없는 토대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런 종교적 바탕 아래 케랄라에서는 이슬람, 기독교, 그리고 힌두교가 자연스레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도인민당의 집권 이후 인도 전역에서 벌어지는 이슬람교에 대한 탄압이나 집단 폭력 사태, 나아가 테러 같은 건 없다.

2008년 사망자만 195명이 발생한 뭄바이 연쇄 테러 때 나는 인도에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보름쯤 지나 케랄라에 도착해서야 안도했다. 전 인도가 종교 분쟁에 휩싸여도 안전한 유일한 곳이라는 믿음은 이렇듯 확고하다. 무려 당시에 케랄라 사람들은 뭄바이 테러를 이야기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인도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지. 여기는 케랄라라고!”

케랄라 찬양의 마지막은 이 지역의 독특한 정치 환경이다. 인도는 1956년 언어권에 따라 주를 나눠놨다. 주를 나눴으니 지방정부를 건설해야 할 터. 그렇게 시작한 선거에서 공산당이 1당이 됐다. 세계 최초였다. 공산당이 투표로 권력을 잡다니? 당시 인도의 집권당은 간디와 네루의 정당인 인도국민회의였다. 네루는 그 자신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남쪽 끄트머리의 공산당 정부만은 용인할 수 없었다. 결국 중앙정부가 개입해 공산당 지방정부를 해산시킨다.

공산당이 이런 식으로 쫓겨나면 무기를 들고 농촌을 기반으로 유격전을 펼치는 게 우리가 아는 상식인데, 케랄라 공산당은 조용히 시골로 들어갔다. 케랄라 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게 된 계기는 진작부터 벌인 문맹 퇴치 운동과 도서관 건립 운동이었다. 활동가들은 하던 걸 꾸준히 했다. 주민들은 글을 읽게 되자 책을 볼 수 있게 됐고 각성으로 이어졌다. 10년 후 공산당은 주정부를 다시 장악하고 이어 1971년, 1977년, 1980년, 1996년, 2004년, 2014년 집권에 성공한다. 영구 집권이 아니다. 케랄라는 일당이 수십 년간 집권하는 인도에서 특이하게도 수많은 정권교체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여차하면 정권이 바뀌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시민의 요구에 즉각 화답할 수밖에 없으니 결국 복지정책으로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케랄라의 오늘은 어떨까? 현재 인도의 평균 문자 해독률은 67.6% 정도다. 케랄라는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90~98%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 일찌감치 실시한 헬스케어 덕분에 영유아 사망률은 인도 평균이 1000명당 62명일 때 케랄라는 13명 수준이다. 케랄라 평균수명은 인도 평균보다 무려 9살이나 많다. 케랄라의 평균 소득이 인도의 평균보다 높아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케랄라의 1인당 평균 소득은 인도에서 12번째로 높을 뿐이다. 저개발 국가에서 지속가능한 복지가 과연 가능하냐는 질문은 오랜 기간 회의적이었다. 여기에 딱 하나의 사례가 있다. 케랄라 모델이 그것이다.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은 케랄라 모델을 사례 연구 대상으로 삼아 ‘성장이 최우선이 아닌 품격 있는 발전’을 모토로 한 발전 경제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그로 인해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기도 했다.

신들의 땅을 만든 건 신이었지만, 그 땅을 유지한 건 인간이었다. 인간에 의해 순식간에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걸 본 나로서는 케랄라를 찬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자명 글·사진 환타 (여행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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