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냉장고 안을 청소했다. 마침 끓이고 있던 된장국에 고추장 반 숟가락을 넣어야 했던 터라 눈에 들어온 고추장이 반가웠다. 뚜껑 위에 박힌 제조일자는 2014년이었다. 절반 정도 남은 고추장 통에서 적당량을 덜어 된장국에 풀고 뚜껑을 닫다가 ‘산들바람’이라는 상표에 눈길이 멈췄다. ‘그랬지, 산들바람이었지.’ 혼잣말을 하고는 된장국 끓이던 불을 끈 채 식탁 앞에 앉았다. 1㎏짜리 매실고추장 통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011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문의 전화번호가 새삼스러웠다.
12년. 무척 긴 세월이다. 모질다면 피해자 입장일 테지만 그 맞은편에 선 가해자는 이 시간이 모질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세월이 아직 모자란 걸까. 뫼비우스 띠의 표면처럼 시간에도 이면이 있다. 어떻게 기억되고 어떤 형태로 보존되는가에 따라 지나간 시간은 길거나 짧게도 느껴지고, 모질거나 수월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렇다 해도 12년은 너무나 압도적인 시간이다. 초등학생이 대학생이 되고 대통령이 세 번 혹은 네 번까지도 바뀌는 시간이니까. 실제로 그랬다. 2007년 4월에 시작된 싸움이 2018년 11월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콜트콜텍 노동자 이야기다.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기타를 치고 연주하고 작곡을 하고 노래 부른다. 인기 밴드 ‘콜밴’이라 불린다. 대법원 앞 1인 시위를 지금도 이어가며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법적 투쟁도 한다.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거래 의혹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훨씬 전부터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서초동 점집’의 무당 노릇을 했다. 경영이 어렵다며 공장 문을 닫은 회사는 꾸준히 흑자를 기록했다. 임원들에게는 보너스를 지급하고 공장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옮겼다. 법이 정한 정리해고 요건, 즉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었고 ‘경영진의 긴박한 해외 도피 이유’뿐이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법의 문을 두드렸고 2심에서도 잘못된 정리해고라는 평결이 내려졌다. 사태 해결의 엄정한 법적 기준이 마련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은 이상한 논리를 동원했다. ‘현재 흑자가 있더라도 미래에 적자가 예상되면 정리해고는 적법하다는 것’이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결성한 ‘콜밴’은 자작곡 ‘서초동 점집’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열네 명의 검은 망토 점쟁이가 요상하게 점을 치네. 미래의 경영까지 점을 치는 신 내린 무당인가? 미래의 경영까지 점을 치는 신 내린 개떡 같은 법원이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싸움이 12년째, 이제 곧 13년을 맞는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기타 회사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장기 탄압을 이어가고 있다. 투쟁 초반에는 45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4명만이 이 힘겨운 싸움의 무게를 견뎌가며 싸운다.
진전 없는 차가운 하루가…
이들에겐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산공장이 있는 인도네시아까지 ‘파견 미술팀’이 직접 날아가 프로젝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닿을 듯 말 듯 해법에는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겨울의 한파와 냉기가 서울 광화문광장 천막 안과 1인 시위 피켓을 잡은 손끝과 발끝으로 곧 전해질 것이다. 콧김 나오는 서늘한 천막의 냉골만큼 진전 없는 차가운 하루.
산들바람이라는 상표로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한 사업을 한 것은 지난 2009년이었다. 한동안 가성비 최고의 재정 품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고추장, 된장, 장아찌 사업. 5년 정도 사업을 한 이후 그것도 접었다. 돌아올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지만 이들에게 돌려줄 이면의 시간은 어떤 것일까. 묵어가는 산들바람 매실고추장에 두부와 호박, 청양고추 몇 개 썰어 넣은 된장국 한 그릇 대접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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