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백이라고 불러.” 영화 〈미쓰백〉의 주인공 상아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아이 지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터인 세차장과 마사지 숍에서 그는 이름 대신 그저 ‘미쓰백’으로 불린다. 세상을 향해 가시를 바짝 세운 채 남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 상아에게는 그런 호칭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독 지은이 불러주는 ‘미쓰백’이란 이름은 마음에 쿡 박혀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미쓰백 엄마는 어디에 있어요?” “미쓰백은 미쓰백이 싫어요?”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상아는 아동학대에 시달리는 지은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을 본다. 그래서 지은을 누구보다 외면하고 싶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지은이가 ‘미쓰백’을 부르고 상아가 그 부름에 답하자 두 사람은 험난한 현실을 함께 견뎌낼 동반자가 됐다. 극장에서 일주일 뒤면 내려갈 것이라던 영화 〈미쓰백〉을 다시 불러낸 건 ‘쓰백러(미쓰백 팬덤)’였다. 상영 시간대의 불리함은 ‘영혼 관람(갈 수 없는 상영 회차를 예매해서 영혼만이라도 보내겠다는 뜻)’으로 이겨냈다.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뭉친 관객들은 예매권을 선물하거나 상영관을 빌려 단체 관람을 추진했다. 마치 영화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이 그랬듯 여성 사이의 연대를 다룬 영화가 여성 관객의 연대로 새 생명을 얻었다.
그 덕분에 〈미쓰백〉은 3주 넘게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었고, 개봉 23일째인 지난 11월3일 누적 관객 70만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개봉 첫 주에 관객 수를 맨 정신으로 확인할 자신이 없어서 술을 마셨다던 이지원 감독은 이제 매일 축하주를 마신다며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웃어 보였다.
이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쓰백〉은 “우리나라에 있는 투자사에서 다 까인(거절당한)” 시나리오였다. 주연배우를 남자로 바꾸면 투자하겠다는 제안도 있었지만 ‘투자금을 회수당하는 한이 있어도 (주연은) 한지민’이라는 감독의 고집이 〈미쓰백〉을 탄생시켰다. 여성 중심 영화라는 이유로 투자 유치에 실패할 때마다 이 감독은 마음속으로 “니들이 뭘 알아?”라는 상아의 대사를 되뇌었다고 한다.
그것은 〈미쓰백〉을 알아봐줄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는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동학대라는 무거운 주제라도, 여성 배우가 얼마나 노출을 했는지 혹은 ‘미모를 포기’했는지로 홍보하지 않아도 극장을 찾아줄 관객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귀 밝은 관객들은 이 부름에 응답했다. 대기업 계열 배급사의 스크린 독과점에 질렸다고 (〈미쓰백〉의 배급사 리틀빅픽처스는 지난 2013년 대기업 독과점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이 모여 세운 회사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성적 대상화나 모성 신화 덧씌우기에도 진력이 난다고.
여성 관객조차 여성 서사를 원치 않는다고?
〈미쓰백〉에는 분명 아쉬운 부분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여성 중심 영화가 관객의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충분히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혹은 한 영화의 실패가 ‘여성’ 영화 전체의 실패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전례를 생각하면 〈미쓰백〉은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미쓰백〉의 주연배우 한지민씨는 런던 동아시아영화제(LEAFF)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다음 날 열린 GV에서 “이전에 비해 관객이 사회적 목소리를 낼 창구가 많아졌다. 한국 시장에서 여성 캐릭터가 이끄는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한씨만의 기대는 아닐 것이다. 올 한 해, 〈허스토리〉를 써내려가고 〈미쓰백〉의 이름을 불러준 관객들의 외침이 ‘여성 관객조차 여성 서사를 원치 않는다’는 일부 제작자들의 게으른 통념을 부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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