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6일, 와이오밍 대학 대학생인 매슈 셰퍼드는 래러미 중심가의 바에서 처음 만난 애런 매키니와 러셀 헨더슨을 따라 그들의 트럭을 탔다. 그다음 날 매슈는 외곽 도로의 울타리에 묶인 채 발견되었다. 권총 손잡이로 잔인하게 얻어맞은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던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미국인의 눈과 귀는 온통 래러미에 쏠렸다. 매슈 셰퍼드는 엿새 만에 숨졌다. 인구 2만6000명의 평범한 시골 마을 래러미는 단 한 건의 살인 사건으로 웨이코와 재스퍼에 맞먹는 기호가 되었다.
텍사스 주에 있는 다윗교 신자들의 거주지였던 웨이코에서는 1993년, 신자들의 불법 무기 소지를 단속하려는 경찰과 마찰을 일으킨 끝에 주 방위군까지 투입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교주와 신도, 경찰을 포함한 76명이 사망했다. 역시 텍사스 주에 있는 재스퍼에서는 1998년, 백인 인종차별주의자 세 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제임스 버드 주니어를 픽업트럭에 매달아 5㎞를 질주했다. 의식이 남아 있었던 버드 주니어는 튀어나온 지하 배수로에 오른팔과 머리가 잘린 채 사망했다(이 글 끝에 버드 주니어의 이름이 한 번 더 나온다).
매슈가 살해되고 4주 뒤인 1998년 11월, 뉴욕에서 활동하는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인 모이세스 코프먼은 텍토닉 시어터 단원 아홉 명과 함께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를 방문했다. 텍토닉 시어터 단원들은 1년6개월 동안 래러미 주민과 200건이 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것을 편집하고 배열한 기록극이 〈래러미 프로젝트〉(열화당, 2018)다. 이 작품은 콜로라도 덴버에서 세계 초연을 마치고 뉴욕에서 공연되며 한마디로 그해의 모든 무대를 휩쓸었다. 〈래러미 프로젝트〉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전문 극단과 아마추어 극단, 지역사회의 주민 극단과 대학·고등학교 등 다양한 극단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린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날 래러미에서 일어난 사건은 증오범죄(hate crime)였다. 둘 다 20대 초반이었던 매키니와 헨더슨은 집까지 차를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 매슈를 트럭 앞좌석에 태운 다음, 곧바로 강도로 돌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물품을 강탈하고 나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매슈를 마을 외곽 도로로 데려갔다. 주범이었던 매키니는 피해자를 죽도록 폭행한 동기가 동성애 혐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매키니의 변호사는 의뢰인을 위해 ‘게이 공포(gay panic)’를 변호 전략으로 내세웠다(‘게이 공포’ 제3막 7장 소제목이기도 하다).
‘피해자 유발론’의 동성애 판본
‘게이 패닉 방어(gay panic defense)’의 줄임말로 쓰이는 ‘게이 패닉’은 게이 남성을 살해한 가해자가 게이 남성이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했고, 이에 충격을 받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해했다는 법적 방어 논리다. 게이 남성이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살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 논리는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피해자 유발론이다. 이를테면 여성 성폭력 피해자를 놓고 “짧은 치마를 입고 밤늦은 시간에 돌아다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피해자 유발론의 동성애 판본이 게이 패닉이다. 원하지 않는 성적 접근에 살인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정상적인 남성이라면 할 법한 행동이며 자기방어에 해당한다는 게이 패닉이 합리적 논리라고 인정해준다면, 거리에는 여성에게 살해된 이성애자 남성의 시체도 즐비해야 할 것이다. 여성이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묻지도 않은 상태에서 단지 남성이 매력을 느꼈다는 이유로 상대 여성에게 성적 혹은 낭만적 유혹을 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살인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퀴어 연구자인 루인은 권김현영이 엮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에 실린 ‘피해자 유발론과 게이/트랜스 패닉 방어’에서 게이 패닉이 법정에서나 사회에서 수용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성애자 남성성을 남성의 유일한 남성성 실천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태도가 없다면 패닉 방어 전략은 재판 과정에서 수용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애당초 전략으로 채택되기 어렵다.”
동성애자들이 게이 패닉에 희생당하는 경우를 보면서 ‘자신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성애자 여성도 많다. 하지만 이성애자 남성이 사회적 가치 규범이 되어 있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여성도 게이 패닉과 똑같은 논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루인은 최근 남녀 연애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안전 이별’을 게이 패닉과 등가에 놓고 비교하면서, 이성애자 여성과 동성애자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얼마나 밀접한 상호 교차성으로 묶여 있는지를 논증한다.
피해자 유발론에 심취한 남자들은 안전 이별 사건의 가해자인 남자를 동정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무책임하게 뒤섞는다. “여자가 갑작스레 동의도 없이 떠나버림으로써, 남자는 자존심이 상하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살인(또는 폭행)은 나쁘지만, 남자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할 만큼 충격을 준 여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게이 패닉 방어와 안전 이별은 모두 이성애자 남성의 이성애와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발동되며, 사회는 그것을 관용한다. 그래서 루인은 게이 패닉이나 안전 이별 사건은 “사회 구성원이 공모한 사건”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어쩌다 “동성애에 관심이 없다. 개인 취향이니 골방에서 알아서 한다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광화문 복판에 나와서 인정 세리머니 하는 동성애자들은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하는 문학평론가·시인·소설가들을 만나게 된다. 공공장소는 이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의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동성애자는 내 눈에 띄지 말라”는 호기로운 선언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자유주의자의 발언으로 허용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금을 낸 시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광장이라는 사실이 안중에도 없는 이들에게 시민권은 이성애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나만 건들지 않으면 관용할게”라는 이성애자들의 입장은 은닉된 동성애자 혐오나 같으며, 게이 패닉을 가능케 해준 구조와 같다. 루인은 이런 자기기만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렇게 짚어낸다. “이성애 남성성을 강조하고 입증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이성애 남성성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질서이자 자연의 질서라는 믿음이 허구임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2010년 10월28일,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증오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매슈 셰퍼드와 제임스 버드 주니어 증오범죄방지법’ 제정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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