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땅을 뭐라고 번역해야 하지.’ 학교 영어 원어민 강사와 대화하던 중 말문이 막혔다. 예전에 닭과 토끼를 길렀던 공터를 지나는 참이었다. 지금은 동물이 없고 텅 비어 있기에 드문드문 잡초와 들풀이 솟아 있었다. 그 땅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수식어가 ‘노는’이었다. 뭔가 특별한 쓰임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는데, ‘playing ground’라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노는 땅, 세상에 노는 땅이 어디 있나. 한국인 기준에는 상추라도 심어야 땅이 한량 신세를 면한다. 사실 ‘노는 땅’이란 보는 사람만 애타고 초조하지 땅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부동산 세계에 노는 땅이 있다면 교육 세계에는 ‘붕 뜨는 시간’이 있다. 붕 뜨는 시간은 학생이 문제집도 안 풀고, 학교 숙제도 안 하며, 방과후 수업도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물론 아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니고 보호자들이 쓰는 표현이다. 붕 뜨는 시간은 부모의 마음을 불안으로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박해성 그림

“놀려봤자 뭐해요.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나 보지.” 대답은 빤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친구들하고 시시덕거리더라도 학원에 다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학원에 대단한 기대를 하는 게 아니라 남들도 엇비슷한 선택을 하고, 집에서 뒹구는 것보다야 뭐라도 하는 게 나으니까 보낸다. 학원 일정에 맞춰 붕 뜨는 시간 없이 일상을 채운 자녀는 피곤한 기색으로 잠자리에 든다. 부모는 이런 장면을 하루를 알차게 잘 보낸 아이의 훈훈한 마무리로 해석한다. 붕 뜨는 시간이 없는 삶은 괜찮은 걸까?

경제학 개념 중 노동의 한계생산성체감 법칙이라는 게 있다. 같은 법칙이 학습에도 적용된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학업 성취도가 높아지지만 그 증가폭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학습 시간을 추가해도 성취도는 향상되지 않고 오히려 감소하기도 한다. 학생의 체력과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의 학습 시간은 한계생산성이 0에 가까워지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더구나 십수 년에 걸친 PISA(경제협력개발기구 주최 국제 학생평가) 결과도 상위권이다. 이 결과를 두고 열심히 하니까 OECD 국가들 중 으뜸이구나, 사소한 부작용이 있지만 앞으로 계속 몰아쳐 순위를 유지해야겠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학생들의 능력은 차고 넘친다. 학습량을 약간 줄인다고 조마조마해야 할 단계가 아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세계 정상급 성과를 오랜 기간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학력 쪽은 과도할 정도로 잘하고 있으니 학습 동기와 생활 만족도를 높이는 일이 PISA에 올바로 대응하는 것이다.

지금의 교육 방식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제대로 마음껏 놀아본 녀석들이 유튜브나 게임 중독에 안 걸립니다. 뭐가 더 재미있는지 겪어봤거든요.” 이런 말을 자녀 상담을 하러 온 학부모들에게 말해도 잘 듣지 않는다. 한국 내부 경쟁에서 도태될까 봐 아이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노는 땅을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고 호미질을 하고야 마는 농부의 마음이랄까.

공부는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PISA 2015 순위에서 전통적으로 상위권에 포진한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타이완,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한국 못지않게 교육열이 강하다. 일본과 홍콩은 중학교 단계부터 비평준화이기 때문에 10대 초반부터 입시 스트레스에 노출되며 교내 규율도 엄격하다. 그런데도 학교생활 행복도는 오히려 한국보다 높다. 학교를 마친 후에 친구나 가족과 함께하며 취미와 여가를 즐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달려가는 교육 방식이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아이들에게 붕 뜨는 시간을 주자. 무거운 현실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할 시간 말이다.

기자명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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