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1930〉은 먼저, 이번 판결에 대해 ‘국제법에 비춰봤을 때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는 아베 신조 총리와 ‘양국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라는 고노 다로 외무장관의 발언을 통해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했다. 이어 1945년 이후 현재까지 한·일 관계 역사와 함께 식민지 지배 자체가 불법이므로 강제동원도 불법이고, 한·일 청구권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관한 협정이 아니므로 당시 신일본제철(신일철주금)은 개인 청구권을 가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해설했다.
이후 〈보도 1930〉은 개인 청구권에 대한 인식 변화를 소개했다. 9·11 테러 유족들이 2016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상대로 배상 요구 소송을 낸 것을 예로 들며, 한국 대법원의 개인 청구권 인정에 대해 설명했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국가 간 문제라며 ‘테러 행위의 지원국들에 맞서는 정의(9·11 소송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미국 의회가 이 법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며, 개인 청구권에 대해 상상도 못했던 변화가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개인 청구권에 이어 제시된 또 다른 인식의 변화는 구 식민지 종주국들의 식민지 지배에 관해 책임을 추궁하는 문제였다. 2011년 네덜란드 법원은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네덜란드 정부가 생존자 1명과 유가족 8명에게 총 20만 유로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 이후 300여 년간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받다가 1942~1945년 일본에 점령됐다. 네덜란드는 일본 패전 이후 인도네시아를 다시 점령하면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네덜란드 군은 1947년 독립운동에 관여됐다는 이유로 라와가데 마을에서 인도네시아인 약 430명을 즉결 처형했다.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1968년과 1995년 즉결 처형은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자, 2008년 생존자와 유족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11년의 판결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첫 번째 판결이며, 민간인 학살과 같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원칙을 적용한 판례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항소하지 않고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2013년 9월에는 64년 만에 공식 사죄를 했다.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 내에서 식민지 지배 역사 다시 보기와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2년 영국 고등법원은, 영국이 1950년대 케냐 식민 통치 시기 10년간 9만명을 학살하고 16만명을 감금한 비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은 케냐 정부에 있다는 영국 정부의 의견을 기각했다. 이에 따라 2013년 영국 정부는 피해자들과 협상한다는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다. 2002년 민주화 투쟁 끝에 24년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세운 케냐인들의 줄기찬 노력 끝에 식민지 종주국 영국은 구 식민지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게 되었다.
2008년 이탈리아 정부는 30년간 식민 통치에 대한 배상으로 리비아에 50억 달러를 보상하기로 했고, 이탈리아 법원은 독일 나치 정부에 의한 강제노동 피해를 당한 노동자가 독일 정부를 대상으로 개인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했다. 〈보도 1930〉은 이탈리아에서의 강제노동 제소 건은 한국의 강제동원 판결과 흡사하다고 했다. 이렇듯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를 지배자의 시각이 아니라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보려는 인식의 변화를 강조하며, 이런 인식 변화가 지금 일본에 특히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독일처럼 피해자에게 사죄하자고 제안
그리고 〈보도 1930〉은 독일이 2000년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설립, 2007년까지 정부와 약 6500개 민간기업(전후 설립된 기업도 동참)이 함께 강제노동 피해자 총 167만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보상금 사업이 종료된 후에도 미래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일본이 참고할 만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도 독일처럼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사죄를 잊지 않는 가해국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물론 〈보도 1930〉의 한계도 있다. 그것은 우선, 교전국이었던 중국에서의 강제동원과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강제동원을 달리 받아들이는 데서 드러났다. 2016년 미쓰비시 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은 중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에게 한 사람당 10만 위안(약 1800만원)의 화해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현재 대상자 3000명 전원에게 화해금을 지급하는 중이다. 〈보도 1930〉 인터뷰에 응한 전 외교관 오카모토 유키오 씨는 미쓰비시 머티리얼과 중국인 노동자 간의 화해와 보상을 실현시킨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 강제노동자와 조선인 징용공은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전쟁터나 밭에서 일본으로 끌려와 노예처럼 강제노동을 당한 중국인 노동자에게는 성심을 다해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스스로 모집에 응해 일본인과 같은 환경에서 월급도 받아가며 일한 조선인 징용공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한반도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식민지 지배를 불법 강점으로 보는 한국 처지에서는 ‘모집’이건 ‘관 알선’이건 ‘징용’이건 모두 ‘자신의 의사에 반한 강제동원’이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를 합법으로 보는 일본의 시각에서는 이 모든 것이 1938년 공표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제국의 외지 조선에서 실시된 합법적인 노동력 동원이다.
일본의 기본 인식에선 모집이나 알선도 징용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억압 상황에서 일제 정부에 의해 본인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증발한다. 이 사실의 무시는 조선인 노동자가 견뎌야 했던 끔찍한 강제노동의 실체로 이어진다. 일본에서도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조선인 강제노동의 실태를 기록하고 고발해왔다. 그러나 일본인 대부분은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한계 뚜렷하지만 편향된 여론에는 반기
그리고 다음 한계는, 아시아 입장에서 봤을 때 일본의 전후 배상·보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1960년대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했던 한국이 이렇게까지 발전한 데에는 일본의 경제원조가 한몫했다는 인식이 일본에서 일반적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한국 정부에 지급한 돈은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경제원조 5억 달러다. 일본도 어려웠던 시절에 원조한,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을 훨씬 웃도는 ‘5억 달러’만 언론에서 강조하니, 일본인 대부분은 마치 일본이 한국에 어마어마한 현금 뭉치를 안겨준 것처럼 착각한다.
일본이 지원한 무상 공여 3억 달러는 대부분이 일본의 생산물이나 설비, 일본인 기술자의 인건비였고 나머지 2억 달러는 정부 차관, 즉 대출금(7년 거치, 20년 상환)이었다. 식민지 사죄 배상이 아닌 이런 경제원조를 통한 책임 회피는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해 1955년 당시 버마(현재 미얀마)를 시작으로 필리핀(1956년), 인도네시아(1958년), 베트남(1959년)에 대한 배상과 라오스(1958년), 캄보디아(1959년), 싱가포르(1967년), 말레이시아(1967년), 미크로네시아(1969년)와의 준(準)배상에까지 관철됐다.
조선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각국에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끼친 일본은 1950년대 초반 주일 미군에 대량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 부흥을 이루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과 동남아시아 각국에 배상 및 준배상이라는 이름의 경제협력을 통해 일본 제품 수출시장을 확대하고 적자였던 무역수지를 개선해서, 1968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일본 사회는 마치 일본이 아시아에 ‘시혜’를 베푼 양 여기는데, 일본의 전후 배상은 실제로는 미국의 냉전 전략의 일환인 배상 요구 포기 정책에 힘입은 경제협력 방식이었다.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은 그 배상 특수 덕분에 가능했다. 이와 같은 보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국 정부, 대다수 언론, 편향된 여론의 몰이해에 대한 〈보도 1930〉의 반박은 비록 시청률이 낮지만 그 가치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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