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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극도 눈물을 흘린다

2018년 12월 06일(목) 제585호
문정우 기자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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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교과서를 새로 받으면 맨 먼저 홀린 듯 읽던 책이 있었다. 지리부도였다. 그곳에서는 무궁한 얘깃거리가 펼쳐졌다. 공간을 압도하는 드넓은 바다와 박력 있게 대륙을 가로지르는 높은 산맥, 텅 비어 오히려 꽉 찬 듯한 메마른 사막. 인간이 그어놓은 국경선이 빚어내는 각 나라의 모양은 또 얼마나 다양하던지. 우리나라의 각 도나 미국 50개 주의 생김새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하나같이 개성이 넘쳤다. 나라나 지자체 가운데는 서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면서도 낳자마자 헤어져 자란 쌍둥이처럼 신통하게 닮은꼴이 많았다.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숱한 오지 가운데서도 유독 지리부도를 덮기 전 마지막으로 꼭 한번씩 눈길을 더 주던 곳이 있었다. 독일과 비슷한 자태에 거짓말을 많이 한 피노키오의 코를 달고 있는 듯한 곳. 1년 열두 달 얼어붙어 있어 하얗게 칠할 수밖에 없는 곳. 바로 남극이다.

ⓒ한성원 그림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남극은 내게 태고의 순수함을 간직한, 환상의 나라였다. 그곳은 새끼를 키우는 데 끔찍하게도 헌신적이며 턱시도를 차려 입은 유쾌하고 사교적인 신사,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악당 같은 면모도 있는 매력 있는 펭귄이 사는 땅이었다. 바다에서 신비한 노래를 부르던 대왕고래가 죽으면 오로라가 되어 우주로 유영해 날아간다는 신화의 땅이었다. 비자도 필요 없고 토지 등기부등본도 없는 곳. 한반도보다 64배 이상 넓으면서도 주인이 없어 제 나라에서조차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이 행성의 숱한 빈자도 공유지분을 가진 평등한 공간이었다. 

언젠가 인류가 생겨나기 전의 역사까지 간직한 만년빙을 크리스털 잔에 담아 온더록을 기울이는 기회를 가졌으면 했다. 남극의 깨끗한 바닷물에 배추를 절여 만년설 녹인 물로 씻어낸 뒤 펄펄 살아 뛰는 크릴과 1년에 아주 조금씩밖에 자라지 못한다는 아이스 피시를 토막 쳐 버무려 넣어 김치를 담그면 어떤 맛일까 상상했다. 쏟아지는 남극의 별빛 아래 빙상이 낸다는 비밀스러운 허밍 소리를 들으며 그런 호사를 누리길 꿈꿨다.

심해의 토종 생물 중 가장 신묘하다는 남극 불가사리도 보고 싶었다. 다리가 다섯 개인 여느 불가사리와 달리 이놈은 다리가 50개나 된다. 잠수정 불빛에 비춰보면 초등학교 아이들이 미술시간에 그리곤 하는 태양처럼 주황색으로 빛난다. 이놈들은 이 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표면에 숱하게 달린 작은 집게로 크릴새우를 잡아먹는다. 그 모습이 흡사 메두사를 닮아 데스 피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은 이미 15년도 더 전에 대부분 깨져버리고 말았다. 일본 <아사히 신문> 환경전문 기자를 지내고 유엔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시 히로유키가 쓴 <나의 지구 편력>이란 책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그에 따르면 남극은 더 이상 문명으로부터 고립된 오지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인간 사회에서 밀려오는 충격을 고스란히 축적하고 있었다. 환경보호 활동가들은 세계 어느 바다를 가더라도 맨 먼저 수영복만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수영복에 묻은 성분을 분석하곤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남극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바다에서 폐기름과 중금속 성분이 검출되었다. 예외란 없었다. 남극의 펭귄이나 물개의 내장에서 인간의 대장에서만 기생하는 박테리아가 나왔다. 남극 빙상의 허밍 사이로 얼음이 거칠게 뜯겨 나가면서 내는, 대포를 쏘는 듯한 폭음이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처럼 긴박한데 사람들은 배 밑바닥에서 바닷물이 밀려드는 줄도 모르고 댄스파티를 즐겼던 타이태닉호의 1등실 고객을 닮았다고 이시 히로유키는 썼다.

그가 책을 쓴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정은 더욱 나빠지는 것만 같다. 얼마 전 영국의 BBC 다큐멘터리 <블루 플래닛 2> 제작팀은  깊이가 1000m 이상 되는 남극해의 바닥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눈처럼 쌓인 것을 확인했다. 유감스럽게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 중국 시진핑 주석, 러시아 푸틴 대통령 등 세계 주요 지도자가 모두 한결같이 ‘생맹(생명·생태·환경에 둔감하다)’이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국제 공조가 순탄하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남극의 기후변화와 관련한 거의 모든 뉴스나 다큐멘터리의 진원지는 피노키오 코의 서쪽, 즉 남극반도 서해였다. 2017년 대붕괴를 일으켜 전 세계인의 눈길을 모은 유명한 라르센 C 빙상이 그곳에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바다로 툭 튀어나와 따뜻한 바닷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이다.

이곳은 이제 하얀색만으로 칠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1950년에 비해 남극반도 서해안은 평균 기온이 5.6℃나 올라갔다. 얼음 없는 기간이 1979년에 비해 90일이나 늘어났다. 북반구로 따지자면 여름이 갑자기 크리스마스까지 연장된 꼴이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반도 서해안 빙하 674개 중 596개가 축소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었던 곳에서 심심치 않게 눈과 비가 쏟아진다. 2016년 반도의 중간 지점인 마거릿베이에서는 거의 일주일간 폭우가 쏟아졌다. 토종 식물인 좀새풀, 노랑꽃이 피는 개미자리가 무더기로 퍼져 나간다. 외래 침입종인 잔디와 지의류 역시 힘을 받았다. 녹색 이끼가 자라는 속도도 세 배나 빨라졌다. 모양 빠지게도 턱시도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 돌아다니는 아델리 펭귄도 자주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남극 생물 99%가 먹이로 삼는 크릴의 미래


최근 과학자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 일은 정작 따로 있었다. 남극은 극점을 기점으로 서남극과 동남극으로 나눈다. 동남극이 두 배나 커서 대남극이라고도 불린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빙하의 유실이 서남극, 특히 주로 남극반도 서쪽에서만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다. 대륙의 3분의 2를 차지한 동남극은 남극 특유의 상공에서 부는 거친 회오리바람 덕분에 따뜻한 공기의 유입이 저지돼 비교적 안정된 상태라고 믿어왔다. 2015년 한 연구팀은 오히려 동남극에서 얼음이 불어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바다 얼음의 양이 소폭 증가해 혼란을 부추겼다. 과학계에서는 낙관론이 번지기도 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바다 얼음이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미국 어바인의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이 나섰다. 동남극 남단의 거대한 토튼 빙하와 모스크바 유니버시티 빙하 두 개에 초점을 맞췄다. 연구팀은 두 개의 빙하에서 의미 있는 유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여러 방면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특히 세계 곳곳의 중력 변화를 측정하는 그레이스 위성 두 개에서 받은 자료가 결정적이었다. 빙하에서 얼음이 줄고 있다면 중량이 줄어들 테고 그렇다면 중력장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연구팀의 측정에 따르면 두 개의 빙하는 매년 18.5기가톤의 얼음을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빙하는 전 세계 바닷물 수위를 5m나 높일 수 있는 물을 저장한다. 토튼 하나만 다 녹아도 해수면이 3m나 치솟을 것이다. 물론 이 빙하를 따뜻한 바닷물이 모두 먹어치우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해수면 상승 예측을 좀 더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기하기에는 충분하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제 동남극에 대한 논란은 종식됐으며 그동안 보수적이었던 해수면 상승 예측도 빨리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해양 폭풍과 쓰나미가 점점 더 많은 인명과 재산을 삼키리라는 예고나 같다.

남극에서 얼음은 사바나에서 풀과 같은 존재이다. 거의 모든 생명이 얼음에 의지해 사냥하고 휴식하고 포식자를 피한다. 온난화와 얼음의 유실은 남극 전체 생태계를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유일하게 남극에서만 살아 진정한 토종인 아델리 펭귄은 생전 구경도 못하던 비가 자주 내리고 휴식처이자 피난처인 바다 얼음이 줄어서 고통받고 있다. 특히 습기를 막는 깃털이 아직 나지 않은 아델리 새끼는 비에 젖은 뒤 찬바람을 맞으면 모두 얼어 죽고 만다. 그 탓에 남극반도 서해안에서 아델리 펭귄 수가 기록적으로 줄어드는 중이다.

기후변화가 모든 종에게 불리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균형을 깬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때 거의 멸종 위기에 몰렸던 혹등고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1년에 7~10%가 불어난다. 얼음이 바다를 덮은 기간이 짧아져 거의 연중 주식인 크릴새우를 즐길 수 있는 덕분이다. 놀랍게도 혹등고래 암컷은 매년 새끼를 낳는다. 젖먹이를 기르는 중에 또 임신을 한다는 뜻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체중이 40t에 달하는 생물체로서는 “미쳤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도 살진 크릴을 좋아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가 트롤 어선을 보내 크릴을 잡는다. 남극조약 가맹국과 유럽연합이 빡빡하게 어업을 관리하지만 얼음이 빨리 사라져 조업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났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남극 생물의 99%가 먹이로 삼는 크릴의 미래는 안전할까. 남극의 크릴을 잡아다가 수족관의 열대어에게 던져주는 기이한 짓을 한 대가로 우리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예전에 남극 바다를 항해하던 배는 크릴 떼가 배기구를 막아 엔진이 과열될까 걱정하곤 했다. 이제 절대 그런 일은 없다. 크릴이 티 나게 줄었다는 뜻이다. 최근 남극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과학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는데, 공포의 본질은 혹등고래의 폭주처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하기 불가능하다’는 점이다(※국립해양박물관은 11월27일부터 내년 3월3일까지 기획전시 <남극-정물·궤적· 유산>을 연다).

참고한 활자:<맵헤드>(글항아리), <나의 지구 편력>(고단샤), <뉴 사이언티스트>, <내셔널지오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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