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베를린 하우스보트에 머물고 계신다고요? 와. 추억 돋네.” “환타님이 아는 집인가요?” “네, 지금 사진 하나 보낼게요. 주인장 보여줘요. 한국에서 환타가 안부 전한다고요.” 잠시 후 지인이 다시 단톡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대요. 지금은 사진 속 아이가 사장이래요.”

이크발 칸카쉬는 인도 북부 카슈미르 계곡에 있는 도시 스리나가르의 ‘하우스보트’ 주인이다. 카슈미르 계곡은 예로부터 수많은 영국인이 휴양지로 애용했는데, 당시 법에 따르면 외국인은 토지를 살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안이 호수에 붙박이 배(하우스보트)를 짓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것이 이 일대의 명물이 되었다.

1999년 5월 인도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일대를 놓고 벌인 카길 전쟁의 와중에 나는 스리나가르에 있었다. 국지전이 발발했는지도 몰랐다. 그 무렵 스리나가르 일대는 늘 그랬다. 군인들은 착검하고, 시가지에는 지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격화된 카슈미르 내전으로 인해 스리나가르 일대는 여행자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우스보트 주인들은 생계를 걱정할 수준까지 내몰렸고, 숙박료를 얼마 낼지 여행자가 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명윤 제공뉴베를린 하우스보트를 운영하는 이크발 씨(오른쪽) 가족.

어찌어찌 소개받아 간 뉴베를린 하우스보트는 화려한 곳이었다. 빅토리아 스타일의 가구, 나무를 깎아 만든 세밀한 조각들. 주인장인 이크발은 간절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 두 명이 400루피면 된다. 세 끼를 주고, 홍차도 무제한 제공하며, 뭍으로 나갈 때 보트도 무료로 제공하겠다. 아이가 아픈데 병원비가 없다. 제발 여기서 머물러주면 안 되겠니?”

인도인들의 거짓말에 익숙해진 터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어졌다. 머문 지 이틀째던가? 갑자기 숙소로 군인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몰려들었다. 군인들은 외국인들이 머문다는 사실에 약간 당황하더니, 나와 일행을 발코니로 내몰았다. 그리고 곧바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AK-47 소총을 든 경계병은 무슨 일이냐는 내 질문에 ‘카슈미르식 웰컴 파티’라며 웃었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대사관에 연락하겠어.” 실제 한국 대사관이 이런 일에 개입할 리 없었지만, 대사관을 앞세운 엄포는 인도 군인에게 먹혔다. 경계병이 위에 가서 보고하더니 곧 비명이 멈췄다. 나중에 안 일인데, 카슈미르 내전이 시작되면서 그나마 형편이 좋았던 하우스보트 주인장 상당수가 반정부군에 자금을 대고 있었다. 이크발도 그중 한 명이었다. 카길 전쟁이 터지자 ‘관리 대상자’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내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

이크발은 외국인인 내가 없었으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실제로 스리나가르에서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연행자들이 차고 넘쳤다. 그가 나를 대하던 애절한 눈빛은 연이어 들려오는 연행 소식에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2011년쯤 마지막으로 그의 숙소를 찾았을 때 그는 반군이니 독립이니 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쓸쓸하게 말했다. 때마침 인도와 파키스탄이 화해 무드로 접어들면서 여행자들의 스리나가르 방문이 늘던 때였다.

뒤늦게 이크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었다. 그의 부인이 나를 기억했다. 이크발은 그날의 린치로 신장병을 얻었고, 최근에 병이 심해져 숨졌다고 했다. 죽기 전 그는 종종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나마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집에서 죽을 수 있게 되었다”라며. 내년쯤에는 그의 하우스보트를 다시 가봐야겠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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