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구상에서 핵의 공포를 가장 크게 체감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잊을 만하면 인공적으로 조성된 지진파가 지진계에 감지되었고, 이것은 이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와 가장 예측 불가능한 나라 사이의 설전으로 이어졌다. ‘핵단추는 항상 내 책상 위에 있다’
‘내 핵단추가 더 크고 강력하다’ 따위 말싸움이 연일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시절이 지난 1월이었다.

‘평화의 바다’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태평양은 수많은 전란의 무대가 된 곳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무기로 평가되는 핵무기 역시, 태평양의 연안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무기 성능을 향상시키는 실험이 꾸준히 실시된 곳 역시 태평양이다.

ⓒGoogle 갈무리태평양에서 핵실험이 일어나자 화염 덩어리가 솟구쳤다.

지금은 수영복 이름으로 더 익숙한 비키니 환초. 파푸아뉴기니에서 북동쪽으로 1600㎞ 떨어져 있는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고기를 잡고 코코넛을 말리며 3000년이 넘도록 평화롭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살던 섬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리는 데에는 몇 초면 충분했다. 1954년 2월, 비키니 섬 근처의 에네웨타크 환초로 높이 4.5m, 지름 1.2m짜리 금속제 원통 하나가 실려 왔다. 군인들은 이 장치를 슈림프(새우)라고 불렀다. ‘건식 수소·리튬 혼합 핵융합 무기’라는 원래 이름을 감추려는 암호명이었다. 이 폭탄은 ‘캐슬브라보’라고 명명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이었다. 실험 목적은 수소폭탄의 크기를 줄여서 폭격기에 운반 가능한 사이즈로 만드는 것이었다. 167명이던 섬 주민들은 이미 수년 전, 미 해군에 의해 다른 섬으로 강제이주 당한 상태였다. 작전의 총책임자는 물리학자 앨빈 그레이브스였는데, 그는 1946년 핵분열 물질 실험 중 발생한 최악의 방사능 사고를 겪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로도 유명했다. 

폭발 실험 당일인 1954년 3월1일을 하루 앞두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동쪽으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곳엔 원주민들이 사는 롱게리크 섬과 롱겔라프 섬이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브스는 실험을 늦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전 6시45분, 태평양의 맑고 파란 하늘을 찢어내며 하얀 빛이 퍼져 나갔다. 폭탄이 터지고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지름 6.5㎞의 화염 덩어리가 생겨났다. 1분이 지나자 잔해 구름이 16㎞ 상공으로 솟구쳤다. 10분이 지나자 지름이 9.5㎞로 확장된 구름이 40㎞ 높이까지 올라갔다. 구름기둥을 덮은 버섯 모양의 상층부는 오렌지 빛으로 불타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태평양에서 폭발한 핵폭탄 23개의 흔적

인근의 산호섬 주민들은 어떠한 공지나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폭발의 위력은 애당초 예상했던 6메가톤을 훌쩍 뛰어넘어 15메가톤을 기록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1000개를 동시에 터뜨린 위력이었다. 그날 오후, 방호복을 입은 군인들이 롱겔라프 섬에 도착했다. 강력한 방사능을 뒤집어쓰고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주민들을 그대로 지나쳐, 그들은 우물로 향했다. 바닥에 설치해놓은 방사능 측정용 가이거 계수기를 수거하기 위함이었다. 이 섬의 주민들은 이후 오래도록 핵무기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의 비키니 섬은 조용하기만 하다. 1970년대 들어 1500만 달러가 넘는 보상금이 이 지역에 지급되었고, 당시의 참상을 아는 이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인근의 섬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이 지역에서 폭발한 핵폭탄 23개가 남긴 흔적을 지우지 못한다. 이렇듯 역설적인 방법으로, 평화의 바다는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인간의 어리석음과 광기의 시대를 태평양은 증언하고 있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