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 애가 둘. 그중 둘째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의심되는 사내아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셋째 대기 중. 한밤의 진통. 출산. 퇴원. 인생의 제3차 세계대전 발발. 하루하루가 백병전. 집안 전체가 노르망디. 남편은 이번에도 전선 이탈. 언제나 그랬듯이 나 홀로 최전방. 메이데이! 메이데이! 숨이 막힌다. 구조 바람. 메이데이! 메이데이!
자, 이런 나에게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꿈을 이루신 거예요. 매일 일어나서 같은 일을 하는 것,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그 단조로움이 가족에겐 선물 같은 거라고요. 그게 실은 멋진 거예요. 별 탈 없이 성장해서 이렇게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 정말 대단한 거라고요.” 뭐? 장난해? 인생 패배를 정신승리로 퉁치며 살라고? 앞으로 평생?
그런데 말이다. 같은 얘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진심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이 해주는 얘기라면? 속는 셈 치고 그 듣기 좋은 말에 기대어, 스스로를 조금 대견하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영화 〈툴리〉에서 그러는 것처럼.
영화 〈주노〉(2007)와 〈영 어덜트〉 (2011)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디아블로 코디는 실제로 셋째를 낳고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다. ‘야간 베이비시터’를 고용한 뒤에야 숨통이 트였다. 밤새 아이 봐주는 사람 덕분에 비로소 잠이라는 걸 잘 수 있게 되면서, ‘내일이 있는 삶’이란 결국 ‘저녁이 있는 삶’이 낳고 키우는 아이와도 같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독박 육아로 지쳐가는 세 아이의 엄마에게 툴리(매켄지 데이비스)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렇게 태어났다.
남이 만들어준 나의 ‘전기영화’
툴리는 아이만 돌보지 않는다. 육아에 눌려 납작해진 여성의 삶까지 다시 생기 있게 부풀린다. “못 이룬 꿈이라도 있었다면 세상을 향해 화라도 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으니) 그저 나한테 화풀이해요.” 이렇게 한탄하는 마를로(샤를리즈 테론)의 이야기를 하품하지 않고 귀담아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마를로에게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박수를 보내는 최초의 사람이다. 두 여성의 우정과 연대가 늦가을 단감처럼 예쁘게 익어가는 후반부에 이르면, 내내 반짝이던 스토리텔링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모든 관객이 일제히 ‘아…’ 하고 탄식하게 되는, 인상적인 클라이맥스가 기다린다.
아직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에겐 어쩌면, 내 이야기가 될까 봐 두려운 ‘공포영화’. 한 번이라도 젖몸살을 앓아본 여성에겐 아마도, 남이 만들어준 나의 ‘전기영화’. 세상 모든 여성들의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판타지 영화’. 남자들이 당장 무릎 꿇고 봐야 하는, 자신들이 저질러온 ‘범죄영화’. 그러니까 한마디로, 안 본 사람 없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게 만드는, 참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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