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 도서관에 특강을 다녀왔다. ‘부모와 아이를 위한 글쓰기’가 주제였는데, 여느 때처럼 가정과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간증하는’ 자리가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고무줄놀이를 하고 심지어 그것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나는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여자 같다’라는 이상한 놀림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 놀림의 말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이 등장하면서) 여장 남자, 성전환자로 바뀌었다가 ‘미스 김’으로 정착됐다. 폭력의 수위도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동급생에게 따귀를 맞았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열네 살 소년이 하굣길에 열네 살 소년을 한적한 곳으로 몰고 가서 그토록 세게 뺨을 때린 것은 내가 여자처럼 여자애들과 어울려 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소년의 이름은 정모였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해 처음 친구로 사귀어 어울려 지내고 싶던 이는 내게 남자처럼 굴라고 경고했다. 그와 나는 영영 친구가 되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건너들은 말에 의하면 그는 그때의 일은 까맣게 잊고 나를 ‘잘 웃던’ 동창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따귀의 힘으로 말미암아 어울려 지내던 여자아이들과 점차 멀어졌다. 그때 그 따귀에는 어떤 교정의 힘이 있었던 걸까.

ⓒ정켈


고등학교 교련 수업에서는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남자 훈련’을 받았다. 그 많은 남성 청소년 중에서 교련이 꼭 필요한 이가 바로 ‘2반 미스 김’인 나였다. 그는 웃는 낯으로 수업마다 빈번히 나를 지목해 남자답게 ‘기준’을 외치라고 하거나, 부러 구령대에 세워 좌향좌 우향우 같은 제식 구령을 하게 했다. 내가 ‘계집애처럼 굴어서’ 웃음거리가 되는 와중에도 그는 “고추 떼라, 인마”라고 말했다. 그때 그 선생은 나를 정말로 남자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거나, 지독한 사디스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든 나는 선생의 명령에 따라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부끄럽게도 남자답게 명령하는 법을 연습했다. 그때 그 훈육에는 어떤 교정의 힘이 있었던 걸까.

최근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여성단체의 초대로 ‘페미니스트 작가로서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참여했다. “학창 시절 폭력의 대상이 되었을 때 제 일기장 가득 무슨 말이 적혀 있었을까요?”라고 묻자 앞줄에서 경청하던 한 여성이 “씨×이요”라고 답했다. 정답이었다. 잠시 뒤 그이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묻지도, 말하지 않아도 그이가 얼마나 끔찍한 ‘믿음’의 희생자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이는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였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해 구타하고, 정화를 위해 자신의 소변을 마시게 하고, 교정을 위해 강간하는 가정폭력 남편(들)에겐 어떤 교정의 힘이 있는 걸까.

교정과 정화를 믿는 ‘가해의 카르텔’

“남자 경험을 알려준다”라며 성소수자인 부하 군인을 지속적으로 추행·강간한 남성과 해당 군인의 피해 사실을 알고도 위로해주겠다며 불러서 성폭행을 한 남성, 해군 간부의 반복된 성폭력에 대한 징역 선고를 ‘무죄’로 뒤집은 고등군사법원의 판결을 보며 교정과 정화를 믿는 ‘가해의 카르텔’이 짓밟은 피해자들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죽도록 얻어맞고 죽음을 결심하는 피해자들 앞에서도 ‘가해자의 사정’을 염려하는 공권력의 믿음 속엔 과연 위력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믿음의 위력이 실은 가해자의 위력이다.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와 군사주의와 이성애자 중심주의라는 믿음은 이미 위력적이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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