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서해안엔 멸치의 사촌 격인 안초비라는 물고기가 산다. 지천으로 널린 이 물고기는 이 지역의 풍요로운 생태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1983년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바다를 가득 채우던 안초비가 사라졌고, 이를 먹고 살던 부비새, 가마우지, 펠리컨이 굶어 죽었다. 1983년은 남미의 어부들에게는 악몽 같은 해였다.

재앙을 맞이한 것은 남미뿐만이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는 기록적인 가뭄이 계속되었고, 술라웨시 섬에는 건조한 날씨로 대형 산불이 일어났다. 끔찍한 태풍이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을 강타했고, 미국 북동부의 스키장은 기온이 상승해 재정난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에콰도르에선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이 기상이변은 전 지구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연쇄반응이었고, 사람들은 이를 ‘엘니뇨’라고 불렀다.

16세기 페루 어부들은 이미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약간 오차는 있지만 5년이나 6년 주기로, 크리스마스 무렵에 바다에서 안초비가 자취를 감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닷물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 아침이면 끼곤 하던 안개가 사라졌다. 오직 푸른 하늘 아래 건조한 바람이 살랑일 뿐이었다. 빈 그물을 거둬 항구로 들어와야 했던 어부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엘니뇨 데 나비다드(El Niño de Navidad)’, 즉 ‘크리스마스의 아기 예수’가 또 왔다고 말하곤 했다.

ⓒAP Photo지난해 물난리가 난 페루 리마의 모습.

이 현상이 페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연쇄반응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이는, 영국의 과학자 길버트 워커(1868~1958)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한 그는 1904년부터 인도에서 기상청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1890년 인도의 우기에 예년보다 비가 적게 내려 끔찍한 가뭄이 닥쳤던 사건을 연구하면서, 그는 태평양의 동쪽과 서쪽이 마치 시소처럼 강수량을 주고받도록 연관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20년간 인도에서 기록한 방대한 자료와, 백과사전적인 지식, 그리고 수학적 재능을 결합해 태평양의 기후를 결정짓는 주기적인 변동을 유추해냈다. 현재 이 현상은 ‘ENSO(El Niño and Southern Oscillation:엘니뇨와 남방진동)’ 또는 ‘워커 순환’이라고 불린다.

엘니뇨를 초래하는 원인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데, 만들어지는 과정은 많이 알려졌다. 핵심은 동서 태평양의 기압 차이다. 적도에는 무역풍이 연중 서쪽을 향해 분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 앞바다에는 바닷물이 쌓이게 되고, 때로 그 차이는 60㎝에 이르기도 한다. 동태평양, 즉 남미 서해안엔 빠져나간 바닷물을 채우기 위해 남극으로부터 차가운 바닷물이 흘러들어온다. 원래 바다 밑바닥을 흐르던 이 해류엔 플랑크톤의 시체 같은 영양분이 잔뜩 함유되어 있다. 이것이 바닷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표면으로 떠오르는데, 바로 안초비를 끌어들이는 용승류(湧昇流)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무역풍의 세기가 약해지면 차가운 남극 바닷물의 흐름이 차단되고, 이는 안초비 떼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남미 앞바다의 수온이 상승해 상승기류가 만들어지면서, 이것이 바다 위에 비를 뿌렸어야 할 구름을 내륙으로 밀어 보낸다. 1983년, 미국과 에콰도르를 덮친 기록적인 폭우가 이것이었다. 반면 태평양 서쪽 끝 인도네시아와 인도에 도달했어야 할 비구름은 무역풍이라는 컨베이어벨트의 약화에 따라 도중에 소멸되고 만다. 이렇게 다른 쪽 끝은 불타는 가뭄을 맞이하게 된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태평양 연안 국가의 기상청들이 엘니뇨 관측 결과를 내놓는다. 이번엔 내년 2월까지 약한 엘니뇨가 발생할 전망이다. 페루 어부들의 크리스마스 식탁은 조촐해질 것이며, 인도네시아 농부들의 속은 타들어갈 것이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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