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지옥 편을 현실에서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의 정글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오스트레일리아 참전 군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일본 천황의 명에 따른 철도 건설을 위해 노예처럼 동원돼 구타와 기아 그리고 질병으로 비참하게 죽어간다. 평범한 인간이 지옥을 관장하는 자(일본군)와 그 지옥을 통과하는 자(참전군)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책은 한 발짝 떨어져서 들려준다. 수십만의 포로들은 철로 건설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학대와 참혹한 노동과 영양실조 아래 동남아시아의 정글에서 죽어간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옥의 지붕 위를 걷는다  꽃을 응시하면서. 

저자가 책에서 인용한 일본 하이쿠 시의 한 대목이다. 오스카 와일드 식으로 표현하면 ‘모두가 진창에 빠진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책에도 지옥의 지붕을 걸으며 꽃을 응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기억이 진정한 정의’라고 외치며 전쟁 포로 토끼 헨드릭스의 스케치북을 불에서 구해내려고 한 보녹스. 쇠약해져 진흙을 기어가는 타이니 미들턴 옆에서 함께 보조를 맞춰 걸어가는 다키 가드너. 그리고 구타로 죽어가던 다키 가드너를 깨끗이 씻기고 숙소로 데려다준 셔그스. 이들은 삶이 무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며 덧없는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준다. 그래서 이 책은 지옥의 묵시록이자 동시에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용기와 사랑에 대한 진실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철로뿐이었던 세계. 그렇게 완성된 철로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은 공사 중에 스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모두를 잊어갈 것이다. 흡사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면서 이집트 문명의 위대함만을 찬탄하는 것처럼. 저자는 책에서 시종일관 기억을 강조한다. 이 전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폭력의 역사가 무한히 반복되도록 하는 사람들의 망각이라고, 지옥은 똑같은 실패를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끔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들은 지옥을 봤고 지옥에서 죽어갔다. 저자는 12년에 걸쳐 이 소설을 완성한 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13년에 출간한 이 책으로 리처드 플래너건은 2014년 맨부커상을 받았다. 

 

기자명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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