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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다, 그래서 책을 펴냈다

2019년 01월 04일(금) 제589호
송지혜 기자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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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에 들어간 ‘섹스’라는 단어 때문에, 한 대형서점은 출판사의 광고 의뢰를 거절했다. 김나연 작가(30)는 섹스 후 숙명같이 찾아오는 다층적 감정, 즉 애정·허탈·책임·불안·자괴감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다. 우연히 발견한 문구는 그대로 책 제목이 되었다.

그렇다고 연애에 대해서만 기록한 건 아니다. 작가는 이번 책을 ‘김나연의 자기소개서’라고 말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살다가 외환위기를 맞고 하루아침에 허름한 골목길 모텔에서 월세를 살아야 했던, 꿈을 찾기 위해 퇴사하자마자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백수 가장이 된, 반 년 넘게 짝사랑하던 사람과 밤을 보내던 날 그의 전 여자친구 이야기만 듣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작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김나연 지음
문학테라피 펴냄
5년간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써놓은 글을 묶었다. 지난 1월, 동네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진행한 독립출판물 제작 워크숍을 수강하며 글의 조각조각이 완결성을 갖도록 새로 썼다. 짧고 긴 글마다 제목을 붙이고 소분류와 대분류로 나누었다. 재고 정리하듯 구분했다. 어느덧 책 한 권의 꼴을 갖추었다.
2013년 블로그를 시작한 건 짝사랑 때문이었단다. ‘나,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야. 나를 좀 봐줄래?’ 그가 글 이면에 있는 ‘나’를 궁금해하기를 바랐다. 짝사랑했던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났지만 그 뒤에도 글을 썼다. 대체로 삶에 염증이 나고, 우울하고 외로울 때였다.

독립출판물 발행 이후 여러 출판사에게서 출간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간 지쳤다. 게다가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는 부담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마음을 바꾼 건 역시 짝사랑 때문이다. 그에게 ‘내 책’을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김나연 작가에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과정은 자기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1월 독립출판물로 출간한 2000권과 11월 출판사 문학테라피에서 출간한 3000권은 모두 팔렸다.

여성의 성욕과 가난, 말하고 싶어

김나연 작가를 책으로만 만난다면 열에 아홉은 그가 솔직하되 비관적이거나 내성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많이 웃고 활발한 편이다. “책이 솔직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면 기분이 묘해져요. 책에서 제가 어떻게 비치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의 이야기조차 못한다는 건가’ 싶어요.” 작가는 책에 하고 싶은 이야기의 70%밖에 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여성의 성욕, 그리고 가난에 대해 더 내보이고 싶었다.

열 살 때 이미 대출·경매·담보 같은 단어를 익힌 작가는 돈의 굴레를 잘 안다. 사회적으로 개인의 능력은 곧 경제적 지위로 결정되고 만다. 돈이 없으면 인격적 결함이 있다고 무시받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하면 잘난 척한다고 오해받는다. 지금껏 가난은 ‘성공’한 후에야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최대한 중립적이고 무해하게만 말해야 하는 ‘돈’, 그 씁쓸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섹스 이야기는 덜어냈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많이 드러났다. 이때 솔직하기만 한 건 결례를 범하는 일이었다. ‘침대에서 독서와 섹스를 함께할 수 있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는 그가, 성욕에 대해 더 말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다. 대신 연애와 관련한 에피소드에는 유머를 넣었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미래를 계획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못다 한 이야기를 두 번째 에세이로 풀어낼 가능성이 높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계속 이걸 해도 되나 보다’ 하는 힘이 생겨요.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글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요?”라고 김나연 작가는 물었다. 그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확언할 수 없지만, 그가 계속 글을 쓰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사IN 조남진
김나연 작가(위)는 이번 책을 ‘자기소개서’라고 말한다.

모든 사연마다
마음에 남는 문장

책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고백하며 시작한다. 글을 읽었다는 느낌보다 작가와 커피 또는 술을 한잔하며 인생사를 들은 느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솔직하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이 담긴 매력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게 만든다. 어느새 작가와 친구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려견 스피츠를 사랑했지만 스피츠가 사랑하는 그 무엇도 충분히 해주지 못해서, 사랑할 자격도 없는 인간임이 상기되어 그 어떤 강아지도 예뻐하기 힘들다는 고백에 작가를 안아주고 싶어진다. 모텔 골목에 살 때 만난 청각장애인 부부의 집에 초인종 대신 현관문 위에 달린 작은 알전구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수화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사연에는, 따뜻해서 울었다. ‘너에게서 나는 가난의 냄새가 싫었다’는 고백에는 마음속에서 찬바람이 세게 불었다.

책은 따뜻한 기운을 뿜으며 꽁꽁 언 마음을 녹여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과감하고 불편한 문장도 있다. 그런데도 발휘되는 공감의 힘이 놀랍다. 구질구질하거나 상처로 읽히지 않는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지난 3월 독립출판물로 출간한 이 책은 제목에 이끌려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된 독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들에게는 ‘20대 사춘기’를 담은 2부부터 읽기를 권한다. 작가를 알고 싶다면 처음부터 정독하기를 추천한다. 모든 챕터에 받아 적어야 할, 저마다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을 것이다. 최다혜 (PIT A PAT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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