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책의 해’였다. 달마다 굵직한 세미나와 콘퍼런스 등이 열렸고, 전국 각지에서 각종 지원 사업이 진행되었다. 아, 책의 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출판사들은, 넓게 잡아 출판계는 오래전부터, 비교적 최근에는 ‘큐레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여 독자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무슨 책 읽어?”를 표어로 내걸고 책의 해를 선포했음에도, 여전히 독자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알 수 없었고, 하여 불황의 골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

올해 출판계의 일원으로서 가장 눈길이 간 일은 동네책방들의 부침이었다. 지난 몇 년간 큐레이션의 힘을 내세워 다양한 동네책방이 태어났고, 사랑도 받았다. 하지만 나름 자리 잡은 동네책방이라고 생각했던 곳들이 올해 속절없이 문을 닫았다. 2013년 9월, 서울 상암동 외진 곳에 생겼음에도, 한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동네서점의 희망”이었던 북바이북이 문을 닫았다. 판교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하나은행 광화문점에 들어가 있는 3호점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파주 땅콩문고도 지난 11월 폐점했다. ‘콜라보 서점’을 표방한 북티크 서교점도 문을 닫았다. 이 책방들은 그나마 얼굴을 알린 곳이기 때문에 폐점마저도 주목되었다. 하지만 숱한 동네책방의 폐점은 사람들의 관심사에도 들지 못했다.

ⓒ연합뉴스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출범식 모습.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 크게 변해

동네서점, 독립서점, 작은 서점 등 붙여진 이름도 다양했지만 통칭 동네책방들의 부침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다. 책 몇 권(?) 팔아서는 보통 2년마다 오르는 임차료를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테면 맥주와 함께 읽는 책, 여행 전문, 시 전문 등등을 내세워 높은 임차료의 파고를 넘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또 다른 동네책방의 희망이었던 서교동 땡스북스가 큰길가에서 좁은 골목상권으로 옮겨간 것도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이리라.

독자들의 책 읽는 방식도 바뀌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안다. 책을 사거나 빌려가기보다 스마트폰 꺼내서 사진 한 방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그걸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거기서 끝이다. 이래저래 동네책방이 조금 소개는 되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문전성시, 아니 명맥을 잇기도 언감생심이다. 책 좀 읽는 사람들에게 ‘혜화동’ 하면 떠오르는 이름, 책방 이음이 지난 11월 어려움을 호소하며 다양한 특별회원을 모집했다. 책을 읽는, 아니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변했다는 것을, 책방 이음의 지난 수년 동안의 부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정부가 나서서 동네책방을 지원한다고 하지만,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돈을 받아서 얼마나 생명을 유지(연장)할 수 있을까. 그러니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명칭이야 어떻든 그 어렵다는 독립출판 혹은 1인 출판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듯, 그 어렵다는 동네책방을 시작하는 사람도 시대를 막론하고 있기 마련이다. 책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작은 시도들, 즉 불황이라는 도전 앞에 동네책방이든 독립출판이든 어떤 응전이라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출판계, 책방, 도서관 등등의 주체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면피 수준이 아닌, 제 단체 잇속만 챙기는 심사가 아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라도 해서 말이다.

‘예능 인문학’의 원래 목적은 무엇일까

언제 어느 때나 그랬지만, 더더욱 요즘은 팔리는 책만 팔린다. 올해는 유독 이분들의 책이 많이 나갔다.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 이를테면 유시민, 황교익, 최진기, 설민석 등의 책은 올해 베스트셀러 목록에 제법 오래 머물렀다. 최근에는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로 혜민 스님이,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는 〈떨림과 울림〉의 저자 김상욱 교수도 방송 출연으로 주가를 올렸다. 혜민 스님이 어떤 방송에 출연했지? 하고 갸웃거릴 필요는 없다. 독자들이 그의 책에 반응하는 이유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후광도 있지만 방송에 출연해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그의 말발(?)도 한몫하고 있다.

출판 전문잡지 〈기획회의〉는 이 같은 현상을 ‘예능 인문학’으로 규정하고 ‘예능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라는 특집을 기획하기도 했다. 중학생 수준으로 기획되는 방송에서 인문학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진짜 인문학이겠느냐는 식의 낮은 수준의 비판은 아니었다. 지식 큐레이터 강양구씨는 6월 출간된 〈역사의 역사〉가 전작들에 비해 “게으른 저작”이라며 지식 소매상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유기고가 노정태씨는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에 대해 “요리를 거론하며 인류학·사회학의 초보적인 논의들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동원한다”라고 비판했다. 쉽게 말하면 막 갖다 붙인다는 거다.

ⓒ시사IN 이명익‘동네서점의 희망’이던 북바이북(위)은 문을 닫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능 인문학에 대한 비판 내지 걱정은 비 오는 날 짚신 파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 혹은 햇볕 쨍한 날 우산 파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 같다고 할 수 있다. 예능 인문학을 향한 비판 혹은 근심은 예능 인문학에서 ‘예능’의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해한다. 웃고 즐기고 떠드는 일로는 인문학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어렵다. 자칫 인문학의 가치와 함의가 입 한번 뻥긋하지도 못하고 웃음에 휩쓸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측면이 있다고 해서 예능 인문학이 무가치하다고 폄하할 순 없다. 이 대목에서 (이름이 이미 그렇게 붙여졌으니) 예능 인문학의 목적을 생각해보자. 인문학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하나의 창이다. 그러니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문학은 꼭 필요하다. 상상해보라. 책에는 ‘1’도 흥미가 없는 사람이 〈오뒷세이아〉를, 〈일리아스〉를 단번에 읽어낼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쉬운 해설서라도 읽는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예능 인문학이 그리스의 어느 곳에서 트로이 전쟁을 이야기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예능 인문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문학의 문턱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인문학이 아니다. 예능 인문학의 당사자들도 이것만이 인문학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 사람은 인문학의 진정한 실체에 접근해보지 못한 사람임에 분명하고, 욕을 먹어도 싸다(생각해보니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에세이 전성시대와 결핍의 함수

2017년 1월 세상을 떠난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했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면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가난한 사람들도 아니고 민주주의라니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지극히 맞는 말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무한경쟁 사회로 빠르게 변모했다. 이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너나없이 자기계발에 힘을 쏟았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도 은근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모두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마음은 저 멀리 사라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9년은 실상 자본의 편을 들어주기 위한 세월이었다. 이 세월 동안 민주주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예능 인문학’의 한 축을 이룬 tvN의 〈알쓸신잡〉.

2018년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책은 대개 에세이였다. 입말이 살아 있는 에세이들은 젊은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우리 시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확실한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어디 책뿐인가. 각종 SNS의 사진이나 짧은 글귀들은 대개 소확행을 꿈꾸는 이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물론 에세이 전성시대가 곧 출판의 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출판 담당 기자들이나 몇몇 평론가들의 대화 주제로 “읽을 만한 책이 없다”라는 말은 술자리 안주 이상의 대화로 발전했다.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진중한 인문학 담론은 그것대로 독자를 확보해야만, 출판은 본래 기능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올해 서점가에서 독자의 선택을 받은 책들은 어쨌든 에세이였다.

몇 해 전, 정의가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 〈정의란 무엇인가〉가 150만 부 넘게 판매되었다. 소소한 것에서조차 확실한 행복을 빼앗기는 시대이다 보니 젊은 세대는 ‘소확행’을 꿈꾸는 책들을 찾을 수밖에 없다. 2018년이 저물어간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또 어떤 책들이 독자들의 선택을 받게 될까.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결핍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 책을 찾게 할 것은 분명하다. 사족처럼 덧붙인다. 책이 좀 덜 팔리더라도, 결핍이 없을 수 없지만, 우리 사회의 결핍이 작을 대로 작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자명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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