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아카데미 시상식. 〈나의 왼발〉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남우주연상을 받고, 〈7월4일생〉의 올리버 스톤이 감독상을 받고, 〈죽은 시인의 사회〉가 각본상을 받는 동안,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분장상·각색상·여우주연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휩쓸었다.
1950~1960년대 미국 남부 한복판에서, 성실하고 지혜로운 흑인 운전기사(모건 프리먼)가 꼬장꼬장한 백인 사모님(제시카 탠디)의 마음을 움직여 친구가 되는 이야기. 감동적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의 문제작(이라고 지금까지도 칭송받는) 영화 〈똑바로 살아라〉를 작품상 후보에도 올려주지 않은 그해 시상식이 두고두고 ‘최악의 오스카’로 비난받고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백인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건 결국 흑인의 선의라고 말하는 영화였다. 바로 지금 눈앞의 인종 이슈를 건드린 〈똑바로 살아라〉 대신, 흑인이 겪은 차별을 ‘옛날이야기’로 추억한 영화에 박수치는 시상식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영화 〈그린 북〉이 만들어졌다.
1962년 미국. 흑인은 백인과 화장실도 같이 쓸 수 없던 때. ‘닥터 셜리’라 불리는, 돈 많고 예의 바르고 교양 넘치는 흑인 뮤지션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가 미국 남부 투어를 앞두고 새 운전기사를 고용한다. ‘떠버리 토니’라고 불리는, 돈 없고 힘만 세고 허풍도 심하지만 사람은 진국이라 믿음직스러운 이탈리아계 이민자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운전대를 잡는다. 8주 동안 함께 부대끼며 위험천만한 여정을 완수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움직여 친구가 된다.
나올 리가 없지만, 속편이 기다려진다
다시 말하지만 무려 30년. 운전석의 흑인이 뒷좌석으로 가는 데 걸린 시간. 꼬장꼬장한 ‘흑인 고용주’의 호의를 이끌어낸 건 어쩌면, 듬직한 ‘백인 운전기사’의 선의일지 모른다고 말하는 영화를 기다린 시간. ‘드라이빙 닥터 셜리’라고 해도 좋을 영화 〈그린 북〉은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 포함,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다음 달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유력한 작품상 후보다.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빼고, 순전히 ‘영화적’으로 닮은꼴을 찾는다면, 이 영화의 ‘톤 앤 매너’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보다 〈언터처블:1%의 우정〉에 더 가깝다. 웃음과 눈물, 음악과 대사, 캐스팅과 캐릭터, 그 모든 것이 조화로운 최상의 버디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화 소재 영화이므로 속편이 나올 리 없는데도, 두 사람의 ‘케미’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속편인들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재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차디찬 세상의 어딘가엔 그래도, 다행히 뜨끈한 아랫목이 남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몹시 그러하다. 이 둘도 그들처럼, 내내 즐겁게 웃기다 끝내 기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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