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中東)’ 하면 자연스럽게 아랍이 떠오른다. 아랍은 인종이나 종족과 같은 혈통 공동체가 아니다. 중동이 지리적 공간을 지칭한다면, 아랍은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통칭한다. 언어 공동체 아랍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민족 개념과 결합하며 정체성을 획득했다.
학자에 따라 규정에 차이가 있지만 중동에는 대략 25개 국가가 있다. 그중 아랍이 22개국이다. 절대다수다. 비(非)아랍은 3개국에 불과하다. 터키, 이란, 이스라엘이다. 그만큼 아랍의 존재감이 도드라진 지역이 중동이다. 아랍 민족은 아라비아 반도와 레반트 지방 및 북아프리카 전역에 두루 퍼져 살아왔다.
특히 7세기 메카가 자리한 아라비아 반도 서부 헤자즈 지방에서 시작된 이슬람의 의미가 크다. 경전 꾸란(코란)이 아랍어로만 기록되면서 자존심과 존재감은 더욱 높아졌다. 이슬람과 결합한 아랍은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지중해권 문명을 선도했다. 아랍은 명실상부한 중동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아랍이 늘 앞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상변경 세력(revisionist powers)이 있었다. 오스만 터키와 사파비 이란이다. 11세기 들어 아랍의 아바시드 왕조가 쇠락하면서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 튀르크인들의 세상이 열렸다. 셀주크조(朝)로부터 시작된 튀르크인들의 중동 장악은 몽골의 정복기를 제외하고는 계속되어 오스만조(朝)로 이어졌다.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오스만조는 지중해 동남 권역을 장악하며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독일과 동맹을 맺으며 연합국과 겨뤄 패배했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중동은 오스만의 주 무대였다.
터키와 이란, 고대로부터 반복된 라이벌
오스만과 겨루던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16세기 초 이란 고원에서 시아파를 중심으로 세워진 사파비 왕조였다. 지금의 이란이다.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통치를 거부했다. 페르시아어로 이란의 전통적인 지도자를 칭하는 ‘샤’의 통치 시대를 열었다. 열두 이맘파(派)로 불리는 정통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삼고 수니파 오스만에 대항했다. 오스만과 사파비의 대결은 국가 단위 종파 분쟁의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고대 히타이트와 페르시아로부터 오스만과 사파비를 거쳐 오늘의 터키와 이란으로 이어지는 라이벌의 반복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20세기 초 오스만의 패망은 다시 아랍의 세상을 열었다. 몰락한 제국 터키는 간신히 패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유럽 열강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제국의 영토를 나누었다. 이때 등장한 다수의 아랍 신생국가들은 점차 중동의 주류로 떠올랐다. 현대 국제질서에서 주권국가의 머릿수가 갖는 의미가 작지 않다. 냉전기에 들어서면서 아랍 각국은 미·소 양 진영으로 편입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은 친미·친서방 진영에 줄을 섰다. 반면 1950년대 이후 일련의 군사 정변을 통해 등장한 아랍 공화정들은 대개 소련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1952년 이집트에서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아랍의 통합을 추구했다. 1956년 수에즈 국유화에 성공한 그에게 아랍 대중은 열광했다. 실제로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권을 통합해 통합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출범시켰다. 식민제국이 자의적으로 나누어놓은 아랍 22개국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이 운동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편 통합을 두려워하며 친서방 진영에 섰던 걸프 왕정 산유국들도 석유 공급을 통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한쪽은 정치 통합으로, 다른 한쪽은 석유 무기화를 통해 아랍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던 시대였다. 이렇듯 냉전기 국제정치와 중동 지역 정치 질서는 아랍을 중심으로 맞물려 돌아갔다. 당연히 미국은 아랍권에 공을 많이 들였다.
반면 중동에서 터키와 이란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나톨리아와 발칸 일부 지역으로 쪼그라든 공화국 터키는 일찌감치 미국에 편승했다. 나토 회원국으로 일찌감치 반소련 전선의 선봉에 섰다. 역내 패권 추구는 엄두도 못 냈다. 제국의 몰락을 목도한 무스타파 케말 파샤 등 터키의 젊은 지도자들은 치열하게 성찰했다. 그들은 패망의 원인을 정교일치의 경직된 이슬람에서 찾았다. 나라를 다시 살리는 길은 철저한 정교분리를 통해 유럽처럼 세속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럽의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이 금기를 타파하고 산업혁명까지 이어진 역사에 대한 성찰의 결과였다. 터키어의 아랍문자 표기도 폐기하고 로마자를 택했다. 공공장소에서 이슬람 복식을 금지하고, 법규와 제도를 서방 맞춤형으로 바꾸었다. 제국의 영광은 잊은 지 오래였다. 오매불망 유럽화하는 데 진력했다. 그래야만 터키에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이란 역시 1953년부터 친서방 노선을 가속화했다. 특히 중동 최초의 입헌왕정을 선언하며 1951년 등장한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1953년 영국과 미국에 의해 축출된 이후, 이란 팔레비 왕조는 거의 서방에 종속된 국가로 비쳤다. 팔레비 샤는 미국과 군사협정을 맺었고, 1960년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샤는 아예 이란을 서구화하려 했다. 이른바 백색혁명이다. 이슬람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국가 경제를 민영화함으로써 친미 절대왕정의 영구 집권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이슬람과 전통 시장(바자르) 상인들을 동시에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란 전역의 모스크 소유 재산을 정리하고, 오랜 역사를 가진 바자르 상인들의 카르텔을 깨려 하면서 사달이 났다. 결국 이슬람과 상인들이 연대해 백색혁명에 저항했다. 이것이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냉전기 터키와 혁명 이전의 이란, 그리고 여기에 1948년 독립을 통해 등장한 이스라엘 등 비(非)아랍 3개국은 중동 내 몇 안 되는 충직한 친미 동맹국이었다. 중동 내부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밖을 꿈꿨다. 반면 당시 아랍은 걸프 왕정을 제외하고는 대개 비동맹 또는 친소련 성향에 가까웠다. 식민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과 반발은 아랍 민족주의의 배경이 되었고 하나의 아랍을 꿈꾸도록 했다. 이는 자연스레 유럽과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냉전이 끝난 후 10년간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1990년 걸프전은 미국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절정이었다. 그러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꿈은 10년 만에 벽에 부딪혔다. 2001년 9·11 테러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들에 의해 본토의 심장부가 타격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목도한 것이다. 미증유의 테러를 경험한 미국은 이듬해 초 새로운 대외정책을 선포했다. 테러와의 전쟁 및 중동 민주화 구상이다.
부시 독트린에 의거한 테러와의 전쟁은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을 열었다. 미국은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정권 교체 또는 정권 변환을 시사했다. 긴장 수위를 높여가며 중동 정치 질서의 재편 의지를 천명했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선제공격 전쟁이었다. 중동은 들끓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축출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승리 이후 안정화 작전이 지지부진해지면서 혼돈이 가중되었다. 후세인의 잔당과 결합한 테러 세력은 오히려 창궐했다.
민주주의를 중동에 심겠노라 호기롭게 선언했던 미국은 뜻하지 않은 상황 전개에 당황했다. 미국 내 반이슬람 정서는 역풍을 불러왔다. 친미 온건 이슬람권 국가들에서도 반미 감정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터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슬람의 부흥을 주장하는 정의개발당이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에르도안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란에도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아프간 전쟁 이후 탈레반을 궤멸하면 자연스레 바그다드와 카불에 민주주의의 싹이 돋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그다드와 카불발(發) 민주주의는 이란의 동서 양편 국경을 넘어 테헤란으로 스며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과는 거꾸로 나타났다. 이라크 안정화 작전이 지지부진해지고, 탈레반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혼돈 국면이 더 심해졌다. 이란은 혼돈을 틈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오히려 이라크 시아파 신(新)정부에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시아파 맹주로서의 자리매김을 새롭게 하는 순간이었다. 수니파 사담 후세인의 부재가 낳은 반전이다.
9·11 테러 당시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알카에다와 상관없는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정권 교체를 운위했다. 이때부터 이란 핵 개발 의혹이 불거졌다. 결국 온건 하타미 정부 이후 반미 강경파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들어섰다.
이란의 시아파 연대(Shiite coalition)는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레바논 헤즈볼라로 이어지며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양상이었다. 중동을 횡으로 관통하며 이란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구도였다. 미국의 애초 구상과는 정반대 현상이었다. 미국과 유럽 및 유엔의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역내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러시아와 중국의 도움도 있었지만, 이란 내부 저항 경제의 내공은 만만치 않았다.
터키 역시 고분고분한 서방의 동맹 국가로만 머물지 않았다. 이슬람의 복원을 기치로 내걸며 집권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서방에 대한 구애 대신 중동에서의 존재감 부양에 나섰다. 냉전 반세기 동안 충직한 서방의 전위 역할을 하며 유럽이 되고자 했음에도 유럽연합 가입을 계속 거부당하는 데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여 있던 터였다. 이제 눈길을 유럽 대신 중동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터키는 산유국은 아니지만 견조한 경제성장을 이루며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발 빠른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아랍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대립각을 선명히 내비쳤다. 2010년 5월 터키발(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구호선단에 소속된 마비 마르마라(Mavi Marmara)호 사건이 그 절정이었다. 이스라엘 해군이 터키 구호선에 승선해 구호활동가를 공격하여 10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아랍의 이웃 나라들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참상에 무관심한데, 이민족인 터키가 들어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팔레스타인을 도왔다는 대중의 찬사가 이어졌다. 이후 에르도안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선거·정당정치 작동하는 나라 별로 없어
2019년 중동 정치 지형은 어떤가? 아랍의 많은 국가들은 혼돈을 겪고 있다. 내전과 권력 승계 문제로 흔들리는 아랍과는 대조적으로 터키와 이란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정치와 경제에서의 영향력과는 별개로 소프트파워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아랍 저자거리 대중의 시선은 정권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아랍 대중의 시선으로 볼 때 터키는 매력적인 국가다. 나름 서방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정 부분 법치주의가 작동해온 나라였기 때문이다. 선거는 정례적으로 시행되고 있었고 비록 군부의 영향력이 작지 않지만 나름대로 정당정치도 활발한 편이었다.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이 집권한 뒤 이슬람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확대되면서 터키의 소프트파워는 점차 강해졌다.
이란은 늘 인근 아랍 권력자들의 경계를 받아왔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은 좀 다르다. 특히 보수 이슬람 사상을 가진 아랍인들에게 이란의 정치 모델 ‘이슬람 법학자 통치’ 시스템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공화제 도입을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함과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이끄는 이슬람 신정주의의 리더십도 동시에 작동한다. 선거 결과는 늘 예측을 뒤엎곤 했다. 독특하지만 매력이 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공존하는 체제다. 물론 최고 지도자와 대통령 간 알력도 없지 않으나 다르게 보면 견제와 균형일 수도 있다.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아랍 대중의 경우 자국과 이란을 대조해보면 결코 자부심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 혁명으로 팔레비 샤를 쫓아냈음에도 세속 공화정이 아닌 묘한 신정주의 공화정을 고안한 이란의 정치체제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왕정은 이란의 혁명 이슬람 사상이 부담스럽다.
아랍의 봄 이후 변화의 시대가 도래하나 싶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희망이 꺾인 상태로 전락했다. 22개 아랍 국가 중 선거와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때 아랍이 아닌 터키와 이란이 나름의 소프트파워를 내세우면서 중동으로 귀환하고 있다. 그나마 역내에서 힘을 보일 수 있는 아랍의 강국이라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 하락과 승계 문제로, 이집트는 아랍의 봄 이후 경제난과 정치 불안정으로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터키와 이란의 존재감이 한껏 높아졌다.
현재 중동의 주인공은 22개로 나뉜 유목 아랍이 아니다. 여전히 제국의 유전자로 패권을 꿈꾸고 있는 터키와 이란, 그리고 200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세워 불쑥 들어온 이스라엘이 주인공에 가깝다. 이들 세 나라 역시 논란이 많다. 터키의 권위주의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란의 신정주의는 여전히 국제사회에 혁명 수출 세력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 대신 유대 국가 정체성을 붙잡으려는 우려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수 아랍의 각성이 필요한 이유다. 각성은 더 탄탄한 정치체제, 지속 가능한 경제 시스템 구축, 치열한 인간 개발 등의 노력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주요 아랍 강국이 빨리 안정적으로 제자리를 찾고, 터키와 이란 등에 대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내는 게 숙제다. 때론 서로 갈등도 있겠지만 테러와 난민 그리고 내전 등 인류 보편의 안보 문제 앞에서 일단 함께 머리를 맞대는 거버넌스를 꿈꾼다면 너무 이상적인가? 지금이야말로 차분하면서도 개혁의 길을 걷는 진정한 아랍의 봄을 그리는 대춘부(待春賦·봄을 기다리는 노래)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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