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우리가 몰랐던 세계를 만나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상점 간판에는 중화요리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閣)·루(樓)·원(園)·옥(屋) 같은 으리으리한 단어가 없다. 그저 점(店)이나 관(館) 따위 이름이 붙은 ‘작은 가게’뿐이다. LED 장식이 가로등 대신 길거리를 비추고, 향신료 냄새와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중국어가 후각과 청각을 마비시킨다. 중국 소도시 하나를 통째 옮겨놓은 듯 날것 그대로다.

서울 지하철 2·7호선이 만나는 대림동은 약 20년간 꾸준히 내국인 인구가 감소해온 지역이다. 2000년 2만4254명이 살던 대림2동은 2018년 1만2758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떠난 자리는 이주민이 채웠다. 2000년 89명에 불과하던 대림2동 상주 외국인은 2018년 9240명으로 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외국인은 이보다 많다. 반드시 이곳에 살지 않더라도, 대림동은 중국 출신 이주민에게 일종의 ‘관문’으로 기능한다. 장을 볼 때에도, 스마트폰을 개통할 때에도, 고향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들러야 하는 ‘배후지’다.

〈시사IN〉은 지난해 12월2일부터 올 1월2일까지 한 달간 이곳에서 대림동을 들여다보았다. 기자는 대림2동 대림중앙시장 인근 작은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내며 원주민과 이주민, 정착민과 임시 거주민을 만났다. 통계와 법률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계에 놓인 삶을 마주했다. 조화와 갈등이 복잡하게 반복되는 이곳에서도 생은 계속되고 있다.

1월18일 금요일 저녁 조선족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림역 12번 출구 모습. ⓒ시사IN 신선영
새벽에 남구로역 교차로에 모였던 조선족 노동자들이 봉고차에 타고 일터로 이동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대림2동 한 음식점 종업원이 가게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월 38만원짜리 고시원 침대에 누우려면 다리를 책상 아래로 집어넣어야 했다. 네댓 번 잠을 설치고 나면 겨우 아침이 왔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냉기에 콧등이 시큰했다. 2018년 12월, 5㎡(1.5평) 남짓한 크기의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냈다.

고시원이 위치한 상가 건물은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로 38길 끄트머리에 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이른바 ‘대림동 메인 스트리트’라 불리는 대림중앙시장 길 한가운데다. 고시원 투숙객 열에 아홉 사람의 모국어는 중국어였다. 방은 12개이지만, 화장실은 하나뿐이었다. 주말이면 지하 1층 가라오케에서 2층 방까지 노랫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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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7일 드론으로 촬영한 대림동 일대 저녁 풍경.

법정동 기준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행정동 기준 대림1·2·3동은 2017년 8월 영화 〈청년경찰〉의 개봉과 흥행으로 새삼 주목받았다. 영화에서 대림동은 가출 청소년을 납치해 난소를 적출하는 일당의 근거지로 묘사됐다. 영화 속 택시 기사는 “여기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도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잘 안 들어와요. 웬만하면 밤에 다니지 마세요”라는 대사를 한다. 대림동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중국동포, 한국계 중국인 등을 통칭) 커뮤니티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제작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2018년 11월8일 1심 재판부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혐오 집단으로 묘사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18년 10월2일 〈동아일보〉는 ‘서울 초교 첫 全(전) 신입생 다문화 학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대림2동에 위치한 대동초등학교 2018년도 신입생 전원이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내용이었다. 오보였다. 〈동아일보〉는 “1학년 70명 중 54명이 다문화가정 자녀”라고 기사 내용을 수정했다. 초등학생이라는 ‘다음 세대’가 부각되며 대림동이 다시 주목받았다. 대림동 내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의 확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재한 조선족은 왜 하필 대림동에 모이기 시작했을까? 동네는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그곳에서 사는 삶은 또 어떨까? 대림동은 정말 위험할까? 우리는 재한 조선족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지난해 12월2일 시작된 ‘대림동 한 달 살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낯선 것들로 가득했다. 이동통신 매장은 위챗(중국 메신저 앱) 아이콘을 붙여두고, 식당 입구에는 틱톡(TikTok: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동영상 기반 소셜 미디어) 아이디가 적혀 있다. 상점에서 취급하는 물건도,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음식도 달랐다. 목 좋은 곳에는 빠짐없이 여행사·행정사·환전소·이동통신 매장이 빼곡히 들어섰고 간판은 대개 중국어 간체로 적혀 있었다.

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느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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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대림2동 풍경.
대림중앙시장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대림동은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복잡했다. 대림1·2·3동도 각각 다르다. 대림1동은 최근 아파트 재건축이 진행 중인 ‘안쪽 동네’다. 지하철 7호선 신풍역과 대림역 사이에 있어서 상가보다는 주거지가 많다. 대림역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대림3동은 상대적으로 ‘젊은 동네’다. 길과 골목이 비교적 정방형으로 구획되어 있고, 아파트와 빌라가 어우러진 평범한 서울 동네에 가깝다. 거주 인구도 가장 많다.

반면 대림2동은 미로처럼 뒤엉킨 옛 골목을 유지하고 있다. 주거 환경만 놓고 볼 때 대림2동은 이 지역에서 가장 낙후됐다. 집은 낡았고, 길목은 좁으며,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대림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상권이 활성화되었고, 지하철 2·7호선 대림역과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인접해 있어서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다. 서울 전역에서 모여들기 쉬운 동네이자, 서울 어디든 이동하기 편리한 동네다. 대림동에서도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대림동’은 대림2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한 조선족은 얼마나 많이, 언제부터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을까. 서울시에서 발표한 ‘등록인구 통계’를 통해 이주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다(아래 그래프 참조). 2000년 대림동 전체(대림 1·2·3동 합계) 인구는 총 8만2139명, 이 가운데 등록 외국인은 299명이었다. 대림2동만 놓고 봐도 내국인은 2만4254명이었지만 외국인은 89명뿐이었다. 상황은 2003년부터 2006년 사이에 급격히 변했다. 2003년 1378명이었던 대림2동 등록 외국인 수는 2006년 5073명으로 3배 이상 급증했다. 이후에도 2007년 6408명, 2008년 8167명으로 꾸준히 증가한 대림2동 등록 외국인은 2018년까지 10년간 8000~1만명을 유지하고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단기 체류자를 고려하면 실제 대림동 거주 외국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림동이 중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일종의 ‘관문(Portal)’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거주 중인 등록 외국인 수가 통계상 10년 동안 정체되어 있다고 해서 ‘2008년 이후 대림동 외국인 인구는 그대로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오히려 이 통계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내국인의 이탈이다. 2000년 2만4254명이던 대림2동 내국인 인구는, 2018년 1만2758명으로 반 토막 났다. 최근 7년 사이 5200여 명이 감소했다. 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늘고 있다.


왜 하필 대림동이었을까. 재한 조선족 주민 다수는 “가리봉보다 살 만해서”라는 이유를 첫 번째로 꼽았다. 대림동 이주는 2000년대 중반 본격화된다. 반지하 월세방일지언정 가리봉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쾌적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인력시장과도 멀지 않았다. 여성들의 경우 강남 지역 식당을 오가기에 2호선이 다니는 대림동은 최적의 위치였다.

대림동의 독특한 부동산 구조도 한몫했다. 특히 재한 조선족의 이주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대림2동은 아파트를 찾기 어려운 동네다. 과거 논밭이었던 이곳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으로 변신했다. 대림2동 대다수 주택은 당시 유행했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다. 2층 독채에는 주인집이 살고 있고, 1층은 둘로 나누어 전세를 놓는다. 지층은 공간을 3~4개로 나누어 월세를 놓는 식이다. 여기에 옥탑방이 추가되면서 8가구 정도가 함께 사는 공동주거 공간이 완성된다. 주민들은 이런 집을 ‘대림2동 표준형 주택’이라고 불렀다.

재한 조선족들이 몰리면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작은 먹거리였다. 식재료 상점부터 연회가 가능한 대형 음식점(대주점)이 2000년대 들어 등장했다. “그때 시장 인근에 ‘전화방’이 많았어요. 길거리에 아예 전화기를 내놓고 영업하는 곳도 있었죠.” 대림동에서 20년 넘게 거주한 내국인 고안수씨(49)의 말이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사람들에게 대림동은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는 공간이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대림중앙시장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렸다. 대림2동 주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며 곳곳이 인산인해였다. 지난해 12월은 연말이라 더욱 붐볐다. 크고 작은 식당마다 송년회가 열렸다. 이른바 ‘대주점(大酒店)’으로 불리는 연회장이나 ‘연변냉면’ ‘하룡냉면’ 같은 유명 식당은 예약 손님으로 붐볐다. 재한 조선족이 대림동이나 구로동에만 사는 건 아니다. 다른 동네에 살더라도 대림동은 필요에 따라 꼭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시장과 식당, 일자리를 구하는 직업소개소 외에도 각종 여가를 보내는 곳이다. 중국산 게임을 할 수 있는 PC방과 당구장 외에도 각종 유흥업소가 몰려 있다.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고,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하며 일자리를 구한다.

대림2동 유동인구의 규모는 서울시 공공 빅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는 전체 행정구역을 1시간 단위로 쪼개 유동인구를 파악한다. 대중교통과 스마트폰 이용량을 분석해 추산한 결과다. 2019년 1월5일 토요일 기준,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많은 시간대와 장소는 저녁 9시 대림2동(약 8070명)이었다(아래 인포그래픽 참조).

학원 전단지 쏟아지는 대림역 12번 출구 

이 밖에도 이주민은 각종 ‘정보’를 찾아 대림동으로 모여든다. 정보의 핵심은 불법체류 단속 등 신분 변화와 관련한 내용이다. 마침 기자가 이곳에 머무른 기간은 법무부가 지정한 ‘특별 자진 출국 기간’이었다. 2018년 10월1일부터 2019년 3월까지, 6개월 내 자진해서 출국할 경우 추후 입국 규제 등 불이익 조처를 취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이 기간 단속에 적발된 불법체류자는 입국 규제 규정이 엄격해져 길게는 10년간 입국이 금지된다. 매주 ‘자진 출국’ 안내문을 나누어주는 이들을 대림역 주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각종 상가 건물에도 ‘불법(체류자) 상담’이라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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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림동에서 인기를 끄는 자격증은 실기 비중이 높은 버섯종균기능사다.

정부의 외국인 출입국 정책은 해마다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라 변했다. 주기적으로 자진 신고 기간을 마련해서 불법체류 중인 이들을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상황에 따라 입국 문호를 넓히거나 좁히기를 반복했다. 제도가 자주 바뀌다 보니 관련 정보에 늘 귀를 기울여야 했다. 대림동에는 한국식 행정절차와 각종 서류 작업을 대행해주는 여행사나 행정사 사무실도 잇달아 문을 열었다. 여행사·행정사 외에도 정부 정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업종이 바로 각종 학원이다.

대림동을 처음 찾은 사람들은 다른 동네에선 볼 수 없는 몇 가지 기호에 혼란을 겪는다. C38·H2·F4·F5처럼 암호 같은 낯선 문구가 점포마다 붙어 있다( ‘F4’ 비자를 따기 위해서라면 기사 참조). “직원 구함. H2, F4, F5, 한국인 가능” “F4를 위한 최고의 선택. ○○○학원” 온종일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림역 12번 출구 근처에서는 정오 무렵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각종 학원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철근 수강료는 60만원이고, 거푸집은 70만원이야. 각각 재료비는 20만원이고. 원서비는 따로 내야 돼.” 형틀(거푸집), 건축도장(페인트), 건축목공(목수), 온수온돌(설비), 방수, 철근, 비계 등 건설기능사 외에도 미용, 요리, 제과·제빵, 세탁기능사 학원이 도림로 인근 빌딩마다 들어차 있다.

‘제빵기능사가 세탁기능사보다 따기 쉽습니다.’ 대림2동에 위치한 한 학원 외벽에 붙은 광고 문구다. 대림동 학원가의 경쟁은 노량진 학원가 못지않다. 합격자 사진을 외벽에 걸어두거나 합격자 명단을 학원 입구에 붙여둔다. 한 내국인 주민은 “요즘은 이곳에서 버섯종균기능사가 가장 핫하다”라고 말했다. 재한 조선족 중에는 대화는 가능해도 한국어 독해나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 버섯종균기능사처럼 필기 비중보다 실기 비중이 높은 자격증이 인기다. 이들 학원은 ‘손쉬운 비자 전환’을 전면에 내걸며 홍보한다. 최근에는 종로나 여의도에 있는 학원까지 홈페이지에 ‘F4(재외동포) 비자’를 내세우며 ‘비자용 학원 시장’ 공략에 나섰다.

잠깐 돈만 벌어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 이들도 비자를 전환하고 체류 기간이 길어질수록 ‘앞으로’를 고민하게 된다. 재한 조선족의 이주는 가족 단위로 확장된다. 혈혈단신 한국에 입국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가족과 친지가 연이어 건너온다. 대림동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김정숙씨(38)는 “우리 집도 지층과 1층에 세를 주고 있는데, 부부가 살다가 애가 태어나면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중국에서 부모가 한국으로 온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대림동 이주가 2인 가구 시대를 열었다면, 2010년대 대림동은 ‘3대가 모여 사는 삶’이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거주 기간이 오래되고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이들은 영주권 비자(F5)로 전환하거나 귀화를 추진하기도 한다. 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지금까지 귀화한 재한 조선족(법무부 분류명 한국계 중국인)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장기 체류를 거쳐 3대 정착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조선족 3세대’다.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세대다. 대림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동포 조직 중 하나인 한마음연합회 김용선 회장(42)은 조선족 세대 구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시대에 만주 땅으로 넘어온 1세대 동포들이 우리 조부모 세대다. 해방 직후 국경이 닫히면서(분단) 그대로 머물며 살다 우리 부모 세대인 조선족 2세대가 태어났다. 하지만 2세대는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농사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3세대들은 그나마 축복받은 세대다. 조선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굳이 한국으로 오지 않더라도 이들 3세대 조선족의 ‘이중 언어’ 능력은 중국 내에서 자산이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칭다오(청도) 같은 연해 지역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 내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 2010년대에 뒤늦게 한국으로 오는 이들도 늘었다. 한국 제조업 기업이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사업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다.

1970~1980년대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교육받을 기회가 많았고, 이중 언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진 조선족 3세대는 2010년대 ‘대림동’을 더 입체적으로 바꿔놓았다. 정착 초기만 해도 이들 3세대는 내국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돈을 모아 상점을 열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한 조선족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다.

3세대 중산층은 주로 자영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 중 하나인 ‘대림중앙문화관광형시장 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윤민진 박사는 대림동 상권의 특성을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를 타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내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다른 동네와 달리, 이주민을 상대로 한 대림동은 국내 경기변동의 영향을 덜 받는다. 다른 지역과 달리, 프랜차이즈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도 대림동 자영업자의 특징이다( 양꼬치 성지엔 프랜차이즈가 없다 기사 참조). 이들은 식당을 크게 열거나, 대림동과 구로동에 비슷한 점포를 여러 개 소유하면서 같은 재한 조선족이나 한족 출신 중국인을 고용하기도 한다.

“한국인 1등, 조선족 2등, 한족은 3등 시민” 

무역업으로 성공하는 3세대도 늘었다. 초기 정착민인 부모 세대와 달리, 중국 내 네트워크가 많다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한국 상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권양석씨(49·가명)는 “한국 내 네트워크가 빈약하다 보니 중국 물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사업은 어렵다. 하지만 중국 내 유통망은 우리가 더 빠삭하니까 괜찮은 한국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기에 상대적 이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은 한국 화장품이다. 보따리상부터 정식으로 법인을 차려서 화장품 수출 사업을 벌이는 이들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이들 회사의 물류창고와 사무실은 비교적 덜 복잡한 대림3동에 모여 있다.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며 영주권이나 국적을 획득한 이들의 등장은 대림동 인구 지형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0년대 들어 3세대 중산층의 ‘재이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고 좀 더 안정적인 주거를 필요로 하는 대림2동의 3세대 중산층이 대림3동으로 많이 이사했다. 단독주택 반지하에서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찾아 상대적으로 정비가 잘된 대림3동으로 이주하는 식이다. 2010년 대림3동 외국인 인구는 3187명이었지만 2018년에는 4907명으로 늘었다. 대림3동에 거주 중인 한 이주민은 “대림2동은 지하철역이나 시장과 가까워 월세가 많이 올랐다. 최근 젊은 친구들이 대림3동에 가게를 많이 냈는데, 젊은 층은 대림2동보다 이쪽 가게를 더 자주 찾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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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중앙시장에서 한 주민이 음식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

아예 대림동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수도권 지역을 눈여겨보았다. 대림동을 벗어난 재이주 지역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집값이 저렴해야 한다. 먼저 이주한 재한 조선족이 있다면 더 좋고, 주변에 전통시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이 있다. 지하철로 언제든 쉽게 대림동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인천 부평구 부평동과 과거 소사구로 묶여 있던 부천시 심곡본동, 소사동 지역이다. 2010년 12월 경기도 부천시와 인천시 부평구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은 각각 564명과 287명이었지만, 2018년 9월에는 부천시 7615명, 인천시 부평구 3892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3세대 중산층은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이 조직한 단체는 1990년대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중국동포 인권운동을 주도하던 ‘교회 커뮤니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지역 언론사는 한때 20개가 넘었다. 이들 단체는 각종 봉사활동과 동포 지원 사업을 벌인다. 목표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차별적 대우를 줄이는 데 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삶’이 ‘한국에 뿌리내리는 삶’으로 바뀌면서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지만 오늘날 대림동의 근간을 이루는 이들 다수는 육체 노동자다( 새벽 4시, 남구로역에 중국어가 울려 퍼진다 기사 참조). 대림동에 거주하거나 대림동을 거쳐 가는 모두가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림동을 오가는 재한 조선족 가운데 다수는 내국인 평균 이하의 소득을 얻고 있다. 재외동포재단이 2016년 실시한 ‘국내 체류 중국동포 현황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54.6%가 연간 소득 2000만원 미만으로 나타났다. 1인 거주자 비율은 28.8%, 월세 또는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이들은 약 72.7%에 달했다.

대림동 곳곳에서도 이 같은 통계를 뒷받침하는 삶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시원에 머무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가장 열악한 주거는 찜질방이다. 대림역 11번 출구 인근에 있는 한 대형 찜질방에는 캐리어 보관실이 따로 있다. 30~ 40ℓ 백팩을 들고 온 이들은 사우나 탈의실 라커 위에 가방을 올려두기도 했다. 사우나 탈의실 곳곳에는 건설 현장 안전모, 세탁용 가루비누, 작업복 등이 방치돼 있었다. 돈이 없어서 월세를 구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지방 현장 일이 끝난 후 다른 일을 찾는 동안 머무르는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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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5일 중국 조선족 자녀와 한국인 자녀가 함께 교육받는 구로도서관 어울림학교에서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대림동에는 재한 조선족만 거주하는 게 아니다. 한국어가 낯설더라도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 한국을 찾는 한족 출신 중국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부는 투자 이민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꽤 많은 한족이 재한 조선족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거나, 재한 조선족 ‘오야지(팀장)’가 이끄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대림동에서 만난 한 한족 출신 중국인은 “여기서 한국인은 1등 시민, 조선족은 2등 시민, 한족은 3등 시민이지 않나”라며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차별받는 것과는 반대 양상이 대림동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특히 한국에서 ‘언어(한국어)’는 일종의 권력이고 자산이 된다. 한 내국인 집주인은 “최근에는 반지하 방에 조선족이 한족을 데려와서 대신 임차 절차를 밟아주기도 한다. 옛날에는 세입자들이 대부분 말이 통했는데, 최근에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입자도 많아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중반 이후 대림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골목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림동 주민들은 “최근 2~3년 사이에 대림동에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라고 말했다. 대림동에 터전을 이룬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나, 부모를 찾아 입국한 젊은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재한 조선족 4세대의 등장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거나, 아예 한국에서 태어난 4세대는 한국 사회에 쉽게 적응했다.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며 걱정스러워한다. 이중 언어를 경쟁력으로 삼았던 3세대와 달리 한국에서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귀화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안 저질러” 

하지만 ‘중도 입국 자녀’로 중국에서 뒤늦게 건너온 4세대의 고충은 좀 더 복잡하다. 부모 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많다. 부모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조부모나 친척 밑에서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언어 문제에 봉착한다. 특히 한국의 공교육 체계에 편입해야 하는 10대는 언어 문제로 교육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적응 문제는 교육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동포지원센터 최승이 센터장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로·대림동 치안이 불안한 건 아니다. 다만 최근 들어 중도 입국 청소년 범죄 문제는 신경이 쓰인다. 이 지역 특성상 부모가 오랫동안 일하러 나가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는 가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청소년 범죄도 늘어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1월18일 저녁 조선족 동포로 구성된 외국인 자율방범대 대원들이 방범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을 대림동 외부에서는 ‘위험신호’로 인지한다. 치안에 대한 우려도 정작 동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대림동에서 오랜 기간 지낸 내국인 가운데 “시장 골목은 조금 낯설고 무서워서 잘 가지 않는다”라는 이들도 있는 반면 “여기서 수십 년 살았지만 ‘칼부림’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다수다. 오히려 재한 조선족들은 “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저질러선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과태료나 벌금 기록이 남을 경우 재외동포(F4) 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 ‘한국 거주 자격을 심사받는’ 이들로서는 범죄기록을 늘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재한 조선족이 모여든다는 이유로 대림동을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미 대림동은 서울 서남권에서 손꼽히는 상업지역이다. “영화 〈청년경찰〉이 대림동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확대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만큼 호기심도 불러일으켰어요. 실제로 맛집을 찾아 대림동에 오는 사람도 많아요.” 한 재한 조선족 상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대림동에 생겨난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대림동에는 언론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식당과 상점이 하나둘 등장했다. 주민들 역시 대림동이 ‘서울에서 들러볼 만한 에스닉타운(이색적인 동네)’으로 자리매김해 사람들이 활발히 오가는 게 가장 긍정적인 미래라고 생각한다. 일부는 시 차원에서 대림동을 ‘차이나타운 특구’로 지정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준으로 보면 재한 조선족 이주 역사는 올해로 27년째다. 대림동의 변화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뿌리내리는 과정이 반영된 결과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이들의 체류를 ‘정착’으로 바꿔놓았다. 정착에는 갈등이 따른다. 정체성과 차별의 문제가 찾아온다. 대림동에서 시흥동으로 옮겨 가정을 일구어 살고 있는 김정필씨(가명·33)는 한국에서 지내는 삶을 ‘세련된 차별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좀 친해진 한국인들도 ‘한국과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 거냐’는 질문을 생각 없이 던진다. 이런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모국이고 중국은 조국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김씨는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이라는 경계에 선 삶을 살아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기사 나가면 악플이 달린다는 걸 잘 안다. 우리한테 ‘짱깨’라고 욕하는 거 다 안다. 그래도 우리 목소리와 우리 삶, 우리가 가진 고민이 대림동 밖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대림동 한 달 살기’ 웹페이지(daerim.sisain.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자명 글 김동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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