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비난을 받는 인물이 있다.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인 AD 26~36년께,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의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다. 예수를 재판했던 이다. 유대인들이 아우성을 치니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사형을 선고했던 까닭에, 졸지에 그리스도 고난의 주범이 되었다. 정작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넘긴 가룟 유다보다 더 비난받는 셈이다.

중동의 복잡한 분쟁사를 이야기할 때 마치 본디오 빌라도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둘 있다.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다. 양국을 대표하는 고위 외교관이던 그들은 1916년 비밀리에 협약을 맺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장차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에 관한 약속이었다. 오늘날 중동의 정치 질서는 이 약속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이후 중동에서 언제 어디서든 ‘사이크스-피코’는 분노를 일으키는 이름이 되었다. 끝 간 데 없는 중동 분쟁의 근원이 바로 이 이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승전국이 되리라 예상하는 당사자들이 만나서 전후 처리를 미리 논의하는 것이 그리 큰 잘못일까? 문제는 당시 영국이 아랍에 한 약속을 배신했다는 데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갈라파고스 제공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군함이 갈리폴리 반도에 진을 친 튀르크군을 향해 발포하고 있다.


영국은 왜 아랍과 한 약속을 어겼나

중동 현대사에 만연한 분쟁과 갈등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1차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적국인 독일 편에 오스만이 가담하자 이 제국을 무너뜨려 광대한 영토를 얻고자 했다. 주로 프랑스가 독일-오스트리아를 상대한 서부전선에서는 그런대로 조금씩 승기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영국이 오스만과 맞붙은 레반트(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 전선에서는 어려움이 컸다. 해군을 주력으로 하는 영국은 사막과 광야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좀처럼 전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1915년에 생겼다. 아라비아반도 서부 헤자즈 지역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알리가,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에게 중요한 제안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후세인은 아라비아반도 명문 가문인 하심의 대표 격이었다. 그는 어떤 내용이 담긴 편지를 영국에 보냈던 걸까?

20세기 초는 지중해권 세력의 판도가 바뀌는 혼돈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궤를 같이한다. 1908년 오스만 제국의 열혈 정객 엔베르 파샤가 청년 튀르크 혁명을 일으켜 1914년 정권을 잡았다. 술탄의 이슬람 정통성보다는 튀르크의 민족주의를 앞세웠다. 종교보다는 민족에 기대어 차제에 튀르크의 발원지인 중앙아시아까지 치고 나가겠다는 야망을 내비쳤다. 노쇠한 제국을 안타까워하고 있던 청년들에게 범 튀르크 민족주의는 복음이었다.

반면 오스만 제국 휘하에서 살아왔던 다양한 민족에게는 배타적 튀르크(터키) 민족주의가 큰 위협이었다. 아랍 주요 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터키 민족주의를 우려했다. 특히 하심 가문 등 명문 아랍 부족의 불안감이 심해졌다. 급기야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인 메카의 태수 후세인을 제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종의 반사작용이랄까? 아랍은 아랍대로 자신들도 민족국가 결집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때 하심 가문이 제일 먼저 나서 대영제국에 제안을 한 것이다.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 편을 들겠다는 것이었다. 후세인은 하심 가문이 주축이 되어 중동 땅에서 오스만 튀르크(오스만 터키)에 대항할 의지를 밝혔다.

 


후세인은 대신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그 공을 인정받기를 원했다. 아랍 통일왕국을 세워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맥마흔의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는 아랍의 반란 계획을 받아들였다. 사실 후세인의 편지는 영국 처지에서는 불감청 고소원이었던 셈이다. 가려운 곳을 먼저 나서서 긁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서신이 오가며 후세인과 맥마흔은 미래 아랍 왕국의 영토를 논의했다. 레반트 지방과 아라비아반도 전역을 달라는 후세인의 요구는 추후 논의하여 확정하기로 미뤄둔 채 아랍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카이로에서 군사고문관으로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파견되어 아랍 청년들과 함께 터키군을 상대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아랍은 늙은 제국 오스만을 해체하고 자신들이 중동을 대표하는 신흥 정치세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기 나라를 세운다는 정치적 꿈이 있어서였을까? 아랍은 사막과 광야에서 용맹하게 잘 싸웠다. 영국이 승기를 잡고 전반적인 전황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을 배신했다. 후세인과 맥마흔 사이에 오간 서신에 담긴 약속과는 배치되는 일을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비밀 약속, 바로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 일부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 관리, 통치하자는 협상이었다. 1915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어진 비밀협상 끝에 1916년 5월16일 양국은 정식으로 협정에 서명했다. 협상 기간을 보면 후세인-맥마흔 서신 교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영국의 이중 플레이였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17년 1월 밸푸어 선언이다.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막대한 1차 대전 전비를 제공해준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시온주의자들의 오랜 염원을 이루어주겠노라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들의 고향으로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역시 후세인이 간절히 원하던 성지였다. 그로서는 메카와 메디나 그리고 예루살렘 등 3대 이슬람 성지를 관할하는 상징성이 중요했다. 성지의 관리자로서 아랍과 이슬람권을 아우르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좌절된 것이다. 이 선언을 기점으로 영국은 이스라엘 독립의 후원자 노릇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후세인과 하심 가문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아랍으로서는 딱히 영국과 프랑스에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1920년 산레모 회의 및 세브르 조약에 의해 사이크스-피코의 분할안은 결국 실현된다. 후세인이 통일 아랍 왕국의 영토로 삼고자 했던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는 쪼개졌다.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하에 복속되었다. 성지 예루살렘은 이주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선주민 사이의 분쟁에 휩싸였다. 오스만 제국 해체 후 중동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세인의 하심 가문은 더 수모를 당한다. 아라비아반도 중부 네지드(Nejd) 출신의 사우드 가문에게 패퇴하여 메카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

 

ⓒGoogle 갈무리비밀 협정의 주인공인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왼쪽)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


산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는 영국이 위임통치를 하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맡기로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제국 해체 작업이 시작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은 통일 아랍 왕국 대신 오늘날 22개 아랍 국가로 재편된다.

단일 왕국 대신 잘게 쪼갠 국가를 만들어놓은 유럽 열강의 논리는 구차했다. 유럽이 30년 전쟁으로 로마 교황의 단일 통치 체제 시대를 해체한 것을 예로 들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근대 국민국가(nation state) 체제를 만든 유럽의 발전 경로를 내세웠다.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등장하여 서로 간섭하지 않고 경쟁과 협력을 통해 유럽 전역이 발전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중동 아랍의 맥락과는 전혀 맞지 않는 논리였다. 유럽은 봉건 제후와 영주들, 그리고 민족 분포에 따라 오랜 투쟁 끝에 국민국가 구도가 형성되었다. 반면 중동의 국가들은 대부분 현지의 문화·종교·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갑작스러운 경계 설정에 의해 급조된 사례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국가와 타자에 의해 강제로 생겨난 국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결국 속내는 제국의 지위를 유지, 획득하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욕심이었다. 사실 영국은 후세인을 애초부터 배신할 의도가 없었다. 다만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우는 프랑스의 불만을 달래야 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중동을 혼자 장악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과 불만을 피력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프랑스를 고려한 중동 재편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아랍과 틀어진 측면이 있다.

해군장관 출신으로 석유 확보에 몰입한 윈스턴 처칠의 존재도 변수였다. 아랍 왕국 대신 영국·프랑스 분할 구도가 확정되면서 영국은 석유 집산지인 이라크 중부의 모술과 키르쿠크 및 남부 바스라 지역을 획득하는 데 진력했다. 쿠웨이트를 포함해 아라비아반도 동부 걸프 해안 지역도 영국의 영역으로 못 박았다. 해양 대국의 명성을 되찾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복원하려면 석유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석유가 있어야 산업을 활성화하고 해군력을 키울 수 있는 시대였다.

오스만 무너진 중동은 제국주의의 먹잇감

프랑스는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을 반드시 차지하려 했다.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 확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지중해 연안 도시 베이루트에서 알레포를 거쳐 유라시아 심장부를 향하고자 했다. 즉, 아나톨리아 남부를 통해 이란 북부 및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려는 지정학적 확장의 꿈이 담긴 첫 출발점이 시리아와 레바논이었다.

전통적 해양 강국인 영국이 이미 해양 루트를 통해 인도와 중국 및 동북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유라시아 끝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전통적 육군 강국인 프랑스는 유라시아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뒤졌기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오스만의 패망을 계기로 내륙을 통해 유라시아 심장부 진출 의지를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 열강에게 오스만이 무너진 중동은 제국주의 확장의 발판이자 도약대로 여겨졌던 것이다.

맥마흔에게 약속받은 후세인의 단일 왕국 꿈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사이크스-피코에 의해 여러 나라가 생겨났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약속하고 기대했던 국민국가 건설은 쉽지 않았다. 중동 지역의 국경만 봐도 대략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중동 지역 국가들의 국경을 살펴보면 전체 연장선의 52%가 기하학적 국경 획정(geometric border demarcation)의 산물이다. 적지 않은 부분이 직선 국경이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은 것이다.

역사적 풍상(風霜)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급조된 나라에서는 분쟁이 일어나기 쉽다. 멀리 갈 것 없이 해방 직후 한반도가 북위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동북아시아의 긴장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22개 아랍국과 터키·이스라엘·이란 등 비아랍 3개국으로 나뉜 중동의 혼돈과 분쟁은 일찍이 예견할 수 있었다. 직선 국경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국가의 급조로 두 가지 갈등 요인이 생겼다. 먼저 하나의 민족 또는 부족 공동체가 인위적 국경 획정에 따라 갑자기 분리된 경우가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쿠르드족이다. 1차 대전 후 민족주의 확산의 기운과 더불어 쿠르드족도 자기 민족국가를 가질 뻔했다. 당시 영국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북부 쿠르드 밀집지역 모술과 키르쿠크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오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특히 패전국 터키가 쿠르드 독립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결국 쿠르드족은 이란, 터키, 시리아, 이라크 네 나라로 찢겼다. 이란을 제외하고는 각각 자주독립을 추구하고 있어서 역내 불안정 요인으로 작동한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쿠르드와는 정반대 사례다. 인위적으로 획정된 국경 안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질적인 민족·종파·종족들이 섞여 들어간 것이다. 중동에서는 이 사례가 더 일반적이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레반트 지역 국가 대부분이 그렇다. 국가로서 정체성 경험이 전혀 없던 이들에게 갑자기 주어진 국가, 국민, 국경, 수도 따위의 개념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태동한 인위적 국가들은 숱한 갈등을 양산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물론, 1970년대 레바논 내전, 1990년 걸프전, 2003년 이라크 전쟁,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시리아 및 예멘 내전의 비극 등이 국가 내 정체성 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동의 갈등과 전쟁의 시원(始原)은 열강의 자의적 국경 획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경험을 이식한다는 명분으로 추구했던 중동 국민국가 건설, 사이크스-피코의 구상은 결국 갈등과 분쟁으로 귀결되었다. 중동 지역 국가의 번영과 발전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하다 보니 시작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외부 세력이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뿌려놓은 분쟁의 씨앗으로 인해 100년 넘도록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남이 세워준 나라를 온존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이크스-피코로 대표되는 식민지 유산은 여전히 살아남아 지금의 갈등과 균열의 원인자로 남아 있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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