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가 떼 지어 나오는 예능도 아니고 화제의 드라마도 아니면서 갤럽이 조사하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순위 앞자리를 고수하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MBN이 2012년 8월부터 방영해온 〈나는 자연인이다〉 말이다.

이 프로그램이 가진 매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치유이다. 저 험한 바깥세상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던 이들이 자연의 품에 안겨 자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는 좇는다. 출연자 중에는 도시에서 남부럽지 않게 돈도 벌고 고급 식당에만 출입했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일상적인 결핍과 소박하고 거친 음식에서 오히려 행복과 안도를 느꼈다고 털어놓는데 진정성이 넘친다. 시청자는 그들을 보며 도시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많은 것이 하찮다고 새삼 고개를 끄덕이면서 위로받는 게 아닐까.

현대 의학이 포기했던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한 이들도 이 프로그램에는 흔하게 등장한다. 각종 암, 뇌혈관 질환, 심혈관 이상, 당뇨, 교통사고로 인한 관절 손상 등으로 가망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이들이 산에 죽을 자리 보러 들어왔다가 소생해 날아다닌다고 말한다. 그들은 야생에서 자라는 약초나 버섯, 그리고 지네나 말벌에 질병을 치료할 특유의 힘이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시청자는 자연인을 따라 같이 산에 올라 익히 알던 산양삼, 더덕, 당귀, 송이, 표고와 이름조차 생소한 삽주, 만삼, 토복령, 잔나비걸상버섯 등을 캐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한성원

프로그램을 지켜보노라면 오래된 논쟁이 떠오른다. 전통의학이 과연 과학인가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발원해 한국·일본에 퍼져 꽃을 피운 동아시아의 전통의학은 그동안 충분히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의심에 시달려왔다. 지금도 의사 가운데는 한의학 치료법에 거친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음양론이니, 기(氣)니 하는 얘기가 주술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특히 서구 언론은 동아시아 전통의학을 유사 과학, 유사 의학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6년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전통의학의 발전과 보급에 힘쓰겠다고 밝히자 ‘국가가 돌팔이를 지원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쓴 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의학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성분이 의심스러운 약재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한의학에 대한 신뢰도 덩달아 추락했다. 조선 시대 명의 허균을 다룬 드라마가 공전의 인기를 끌어 한때 최고조에 달했던 한의대 지원 열기도 식었다. 한의학도 가운데는 전통의학이 철학이나 신념이 아닌지 고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무조건 믿고 혈자리를 외우라는 교수의 침술 강의에 절망해 ‘압정을 깔아놓고 뒹굴면 만병통치라고 가르친다’는 자조도 나오는 형편이다.

그런 와중에 뜻밖에도 한의학의 매력에 빠진 이들은 미국과 유럽의 의료 소비자였다. 한국의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현대 의학에 실망해 새로운 길을 찾다가 아시아의 의술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방병원에서는 온몸에 침을 꽂고 누운 흑인이나 백인 스포츠 스타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과학적으로는 모르겠고 우선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벗어나게 해주니 살겠다’는 게 그들의 전통의학 옹호론이다. 그 덕분에 침술, 부항, 허브 치료가 빠르게 성장 중이다. 일부는 의료보험 대상에 포함됐다. 환자는 온라인에서 약초 처방을 찾아 아마존에서 주문한 뒤, 유튜브에서 탕약 달이는 법을 배운다. 미국에서 약초 시장은 2017년 80억 달러로 2008년에 비해 68%나 성장했다.

중국 전통의학이 서구에 감명을 준 첫 사례는 말라리아 예방약 개발이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국의 화학자이자 의생리학자인 투유유(屠呦呦)는 베트콩이 말라리아와 싸우는 걸 돕는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베트콩 사상자의 절반이 말라리아 환자였다. 그녀는 고대 중국 의서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해열제로 처방된 식물을 추려나가다가 1972년 쑥에서 마침내 치료제를 추출해냈다. 그녀의 연구 결과로 나온 말라리아 치료제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 중국명은 칭하오쑤·靑蒿素)이 수백만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아 2015년 노벨상을 받았다.

미국 예일 대학 약리학 교수 영치 쳉은 1990년대에 많은 암 환자가 심한 설사와 구토 탓에 화학요법을 포기하는 데 주목했다. 화학요법을 견뎌낸 환자는 오래 살아남기 때문에 어떻게든 부작용을 줄이는 법을 찾고 싶었다. 그는 예일 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인 중국의 죽간 의서에서 복통과 설사를 치료하는 처방전을 발견했다. 임상 시험을 거듭한 결과 처방받은 대부분의 환자가 부작용 완화를 경험하는 개가를 올렸는데, 그 못지않게 주목할 사실이 있었다. 뜻밖에도 환자의 종양도 빠르게 줄어든 것이다.

그는 스컬캡(황금)·감초·작약·대추에서 추출한 성분을 합성한 약에 PHY906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약은 현재 직장암, 간암, 췌장암 치료를 위해 화학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는 환자 8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 중이다. 쥐 실험에서는 종양을 먹어치우는 대식세포가 현저하게 늘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쳉 연구팀은 이 약이 여러 종류의 약초를 혼합한 것으로는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밖에도 UCLA, 듀크, 옥스퍼드 등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대학의 연구자들이 암, 당뇨, 파킨슨병 등의 치료에 동아시아의 전통의학을 접목할 방법을 꾸준히 찾는 중이다.

전통의학 의사는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해져야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전통의학이 새롭게 조명을 받는 데 가장 고무된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 관영매체 신화통신은 2016년 중국 전통의학이 세계를 점령해가고 있다고 흥분했다. 중국은 공자연구소를 통해 유럽과 미국 현지의 중국 전통의학 교육을 지원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은 중국 전통의학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2017년 중의원에서 진료받은 사람은 10억2000만명, 지난해에 비해 5.9% 늘었다. 중의원은 5만4000여 개로 지난해보다 4700여 개나 많아졌다. 2017년 말 현재 6년간 중의사 수는 50% 이상 불어 45만명이 넘는다. 전 세계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내수가 확대돼 중국 농장은 약초 재배지를 점점 넓혀간다. 2017년 중국 농가는 약초를 팔아 250억 달러를 벌었다. 중국에서 현대 의학과 전통의학은 법적으로 동등하다.

서구가 동아시아의 전통의학을 얕잡아보는 데는 분명 위선적인 면이 있다. 현대 의학은 서양 의사들만이 일군 업적은 아니다. 동서양의 숱한 자연과학자들의 연구가 집적된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전통의학이 현대 과학을 차용하려고 하면 방해하거나 조롱한다. 현대 의학도 나름 치부가 있다. 연간 수십억 달러 시장을 형성한 항우울제와 관련한 논쟁이 좋은 예다. 일부 연구에서 항우울제는 플라세보 효과를 겨우 상회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진통제의 과잉 처방, 의사가 보증하는 다이어트 약, 의심스러운 수술 등 모두 들추면 냄새가 나는 현대 의학의 구린 면이다. 현대 의학도 한계에 이르면 철학과 만난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의학의 검증되지 않은 면까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욕조의 물을 아이와 함께 쏟아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는 곤란하다. 음양론이나 침술의 기반인 혈자리 등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대학에서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말고 앞으로 연구 과제로 남겨야 한다. 전통의학 의사는 과학적 방법론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 유수한 국제 과학 저널에 실린 임상 실험 결과만 보자면 전통의학은 겨우 편두통과 비만에 미미한 효과가 있을 뿐이다. 전통의학이 효험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전통의학 의사의 과학적 소양이 부족해서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소가 중국 전통의학 임상 사례 70건을 문헌 조사한 바에 따르면 41건은 실험이 잘못 설계돼 있었으며, 29건은 샘플이 너무 적고 결과를 의심할 만한 흠결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의학이 과학과 충돌하는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의학이나 중의학은 환자 맞춤형 진료를 고수한다. 같은 감기 환자라도 처방은 다 다르다. 기후와 토질이 다른 곳에서 자란 생약재를 쓰니 공진단이라고 다 같은 공진단이 아니다. 약재를 여러 개 섞으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FDA의 승인을 받은 허브 처방약은 단 두 가지뿐이다. 녹차에서 추출한 성기 종양 치료제와 남미의 용혈수 수액으로 만든 설사약. 둘 다 한 가지 약초에서만 추출한다. 균질한 약품을 만들려면 변수를 통제해야만 하는데 약초 수가 늘면 그게 힘들다. 전통의학에서는 예사로 여러 가지 약재를 섞는다.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조차 힘들다.

전통의학이 멸종위기 종을 포함한 동물 부위를 직접 약재로 쓰는 점도 세계화되기 힘든 점이다. 중의학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천연 재료 중 22%가 멸종위기 종으로 나타났다. 중국에서 가장 큰 보저우 약재시장에서는 국제적으로 거래가 금지된 천산갑이나 개미핥기 등의 부위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원산지 표시가 없다. 상인조차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구 과학자와 의료 소비자가, 기록된 것만 따져도 2200년 넘게 정제된 동아시아의 전통의학이 보물이란 점을 알아차린 뒤 전통의학 시장이 폭발했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전통의학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싶다면 관리하는 방식을 외부 홍보와 내부 애국심 고취에 치중하는 중국보다 훨씬 실용적으로 혁신할 필요가 있다. 약재 안전기준과 원산지 표시를 강화하고 품질을 표준화해야 한다. 한의사가 첨단 진단 장비를 능숙하게 다루고 현대 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적절히 조언할 수 있도록 한의대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 그게 한의학이 과학으로 우뚝 서는 길이기도 하다.

참고한 활자: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코노미스트〉 〈뉴사이언스〉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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