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뭘까? 때에 따라 내가 더 돈을 많이 낼 수도 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애인을 오래 기다릴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며 생기는 기나긴 싸움을 견딜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다 포기한다 하더라도, 내가 나 자신이기를 포기하며 살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타인을 포함해 나에게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진실하지 않은 삶은 아무리 잘 살아도 가짜일 테니까.

언제나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받던 A 선배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그가 선비 같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했고,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근처에 살던 우리는 종종 밤 산책을 했는데, 그는 자신에 비해 내가 자유분방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선지 질문이 많았다.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만났어? 어떤 대화를 했어? 잤어? 좋았어?” “나는 여자친구를 처음 사귀는데 여자친구는 그렇지 않나 봐. 이게 자꾸 생각나고 서운하다”라고도 했다. 이런 얘기도 했다. “여자친구와 모텔에 가잖아. 그러면 벽 뒤에서 다른 여자 신음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면 되게 흥분돼. 그런데 여자친구가 신음소리를 크게 내면 좀 꺼려져.”

ⓒ정켈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나는 그에게 ‘벽 뒤의 신음소리’구나. 그는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 그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집에 가겠다는 내 손목을 붙잡고 가로막으며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다.

때로는 나도 신음소리를 크게 내 애인을 불편하게 하는 벽 안쪽 여자친구였다. B는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 있고 싶어 했던 충성스러운 애인이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류의 여자들의 생김새와 행동, 꾸밈새에 대해 자주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남자들의 눈요깃거리, 몰카와 강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서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야한 화장을 하지 말고, 은밀한 단둘만의 공간이 아니라면 섹스 얘기를 꺼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명시적으로 돈이 오가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움과 보살핌, 관계 유지를 위해 섹스를 하는 게 성매매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그는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들과 너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다그쳤다. 나는 그가 나를 익명의 타인과 철저히 구분하고 특별하게 바라본다는 점, 나를 강하게 열망한다는 점이 썩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난감했다. 그가 내게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사람들마다 각각 살아가는 방식과 성격이 다른 정도로 다를 뿐이었다. 그와 내가 다른 꼭 그만큼만 달랐다.

‘그가 원하는 존재’로 사는 게 사랑일까 구애를 받는 여성은 정말 권력을 가진 존재일까. 그들에게는 사랑이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지만 여자에게는 자주 나로 살 것이냐, 아니면 그가 원하는 존재로 살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둘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무게가 이만큼이나 다르다면 그건 과연 평등한 관계일까. 나는 자신이 구축해놓은 세계의 범위를 넓히고자 모험을 감행하는 남자가 택하는 일탈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지켜줘야 할 유리 덮개 속 장미꽃도 아니었다. 구태여 그런 역할에 나를 맞추며 살 필요는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오랜 시간 외로움을 견디는 게 나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얘기한다. 또 수많은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결국 눈치를 보다 지쳐 침묵하게 된다면, 그래야만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여전히, 감히 사랑일까.

기자명 김민아 (페미당당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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