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받던 A 선배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그가 선비 같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했고,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근처에 살던 우리는 종종 밤 산책을 했는데, 그는 자신에 비해 내가 자유분방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선지 질문이 많았다.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만났어? 어떤 대화를 했어? 잤어? 좋았어?” “나는 여자친구를 처음 사귀는데 여자친구는 그렇지 않나 봐. 이게 자꾸 생각나고 서운하다”라고도 했다. 이런 얘기도 했다. “여자친구와 모텔에 가잖아. 그러면 벽 뒤에서 다른 여자 신음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면 되게 흥분돼. 그런데 여자친구가 신음소리를 크게 내면 좀 꺼려져.”
때로는 나도 신음소리를 크게 내 애인을 불편하게 하는 벽 안쪽 여자친구였다. B는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 있고 싶어 했던 충성스러운 애인이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류의 여자들의 생김새와 행동, 꾸밈새에 대해 자주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남자들의 눈요깃거리, 몰카와 강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서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야한 화장을 하지 말고, 은밀한 단둘만의 공간이 아니라면 섹스 얘기를 꺼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명시적으로 돈이 오가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움과 보살핌, 관계 유지를 위해 섹스를 하는 게 성매매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그는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들과 너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다그쳤다. 나는 그가 나를 익명의 타인과 철저히 구분하고 특별하게 바라본다는 점, 나를 강하게 열망한다는 점이 썩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난감했다. 그가 내게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사람들마다 각각 살아가는 방식과 성격이 다른 정도로 다를 뿐이었다. 그와 내가 다른 꼭 그만큼만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얘기한다. 또 수많은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결국 눈치를 보다 지쳐 침묵하게 된다면, 그래야만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여전히, 감히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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