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9월18일 대한민국 형법이 제정되었다. 제297조부터 제306조까지가 성범죄 규정이었다. 강간죄와 강제추행죄를 정의하고 그 양태에 따라 처벌 규정을 달리했다. 1953년 형법이 제시한 뼈대는 지금도 성범죄를 처벌하는 기본 틀이다. 일부 조항이 바뀐 형법과 새로 제정된 성폭력특별법,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아동복지법 등이 현행 성범죄 처벌 체계를 이룬다.

성범죄 관련법의 65년 변천사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전통적 흐름은 중벌주의다. 흉악범죄가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 여론은 혹형을 요구하고, 국회는 양형을 강화하도록 법을 고쳤다. 더디지만 달라진 성 의식도 반영되고 있다. ‘부녀’나 ‘정조’ ‘음행의 상습’ 같은 용어를 고쳤다. ‘피해자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존속하던 성범죄 친고죄를 삭제했다. 국회 안팎에서 나오는 비동의간음죄 논의 역시 이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연합뉴스2010년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의 현장검증 모습. 이 사건이 ‘성폭력처벌법’ 제정 계기였다.


1995년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될 때까지 형법상 성범죄 조항들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변경 취지는 1992년 법무부가 펴낸 ‘형법개정법률안 제안이유서’에 적혔다. “정조에 관한 죄란 성적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범죄라는 인상을 주어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하는 범죄의 명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즉 ‘보호법익’을 반영하기 위해 장의 제목을 바꿨다는 이야기다.

국회, 형량 늘리는 방향으로 입법

그러나 학계에서는 1995년 이후 성범죄 판례들도 ‘정조에 관한 죄’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2002년 조국 서울대 교수(현 청와대 민정수석)는 논문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성폭력범죄〉에서 “현행법은 외관상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강한 보호의 외관을 갖고 있으나, 그 강한 보호의 바탕에는 여성의 ‘정조’만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적 관념이 깔려 있다”라고 썼다.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가 대상인 혼인빙자간음죄(2012년 폐지)에 그 흔적이 남았다.

국회의 성범죄 관련 입법은 형법이 정한 틀을 유지하되 사안 성격에 따라 형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계기는 주로 흉악범죄였다. 미성년자나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언론 보도로 알려지면 엄벌 여론이 일고, 국회는 해당 사건과 비슷한 범죄의 형량을 늘렸다. 1994년 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구 성폭력처벌법)’과 2000년 제정된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이 대표적이다.

구 성폭력처벌법은 1991년 아동 성폭력 피해자가 성년이 된 뒤 가해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제정된 특별법이다. 친족 간 강간과 장애인 강간을 따로 규정해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형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던 업무상 위력을 이용한 추행,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도 범죄로 규정했다. 2008년 조두순 사건, 2010년 김길태 사건 등을 계기로 국회는 특별법을 대폭 고쳤다. 구 성폭력처벌법은 폐지되고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이 제정됐다. 13세 미만 미성년자 대상 성폭력범죄 법정형을 늘리고 친족 강간 처벌 대상의 범위를 넓혔다. 2011년 영화 〈도가니〉의 영향으로 장애인 대상 성범죄 형량이 상향됐다. 기존 청소년성보호법은 2009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로 개정됐다.

2012년 성범죄의 친고죄 규정 삭제

성범죄에 중형을 가하는 성범죄 관련법 제·개정안은 국회에서 크게 찬반이 나뉘지 않았다. 범죄자 신상공개, 전자발찌 부착 등 각론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대개 엄벌 주장이 우세했다. 1999년 12월28일 청소년성보호법의 범죄자 신상 공개를 두고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헌법이 규정한 사실상의 이중 처벌(금지)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조순형 의원은 “18세 미만 청소년을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성행위의 대상으로 하겠다는 우리 사회 구성원에 대해서는 기본권의 보호를 해줄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성범죄 관련 특별법을 다루는 법안소위 회의에서는 ‘보균자’ ‘물리적 거세’ 따위 표현도 등장했다.

 

ⓒ연합뉴스2018년 9월 여성 의원들이 ‘비동의간음죄 신설’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법안은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가운데)이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무거운 형벌보다 친고죄 여부가 핵심이라고 주장해왔다. 주로 진보적 법학계와 여성계가 이런 견해였다. 형법이 강간죄 등을 “당사자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라고 정했기에 처벌이 어렵다는 것이다. 2006년 국회 법사위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한인섭 서울대 교수(현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장)는 “친고죄를 그대로 놔두고 우회적인 다른 여러 조치를 집어넣는 것은 본을 놔두고 말을 건드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각계의 요구가 잇따르자 국회는 2012년 형법을 개정해 성범죄의 친고죄 규정을 삭제했다. 강간죄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바뀐 것도 이때였다. 남성과 성전환자도 강간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가장 뜨거운 논점은 미투(me too) 운동이 촉발한 비동의간음죄 신설 문제다. 비동의간음죄는 지난해 9월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내용으로, 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 여성 의원들도 발의에 동참했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라는 강간죄·강제추행죄 성립 조건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로 한다는 게 골자다. 기존 강간죄를 구성하던 ‘폭행 또는 협박이 동반된 행위’는 가중처벌하도록 정했다. 제안자들은 제안 이유에 “판례는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폭행 또는 협박’ 정도를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고 있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충분한 보호를 위해”라고 밝혔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강력 성범죄 양형 규정과 달리 강간죄 구성요건 논의는 국회에서 인기 있는 이슈는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문제를 제기하는 의원들이 등장했다. 2006년 열린우리당 이원영 의원은 “강간죄 형량이 3년 이상으로 높다 보니 ‘폭행·협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한다”라고 말했다. 2008년에는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요건에 폭행과 처벌 외에 ‘위력’을 추가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제19대 국회에서도 새누리당 함진규 의원이 ‘최협의설’을 폐기하는 형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다(판례는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동반될 때만 강간을 인정하는데 이를 ‘최협의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 법안은 별다른 논쟁 없이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비슷한 법안을 내놓았던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2010년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형법 개정이 헌법 개정보다 어렵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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