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회사 근처에는 아담한 규모의 영화 박물관이 있어. 그 초입에서는 20세기가 막 열렸을 무렵, 즉 1901년께 대한제국의 생생한 풍경을 볼 수 있단다. 미국 시카고 대학 사진학과 교수였던 버튼 홈스가 한국을 방문해 찍었던 활동사진 기록이야. 흥미로운 장면이 많은데 여성 몇 명이 함께 춤사위를 펼치며 춤을 익히거나 잔뜩 긴장한 채 일대일로 조선 춤 수업을 받는 듯한 모습도 등장해. 이들은 기생(妓生)이었지.

조선 시대 기생들은 황진이처럼 양반 뺨치는 학식과 교양을 지닌 이가 많았어. 춤과 노래 등 저마다의 장기를 지닌 연예인이자 예술인이기도 했단다. 나름 엄격한 규율을 지니고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며 재능에 따라 위계도 확실히 따지는 전문가 집단의 성격이 강했지. 나라가 망하고 기강도 무너지면서 위상이 많이 떨어졌지만, 또 일제가 공창(公娼) 제도를 실시하면서 기생들이 관의 통제를 받아야 했지만, 기생들의 자존심은 밟아도 뿌리를 뻗는 민들레처럼 끈질기게 살아 있었지. 그리고 100년 전인 기미년, 조선의 기생들은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게 돼.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기(義妓) 논개의 후예답게 진주 기생들은 녹록지 않은 기질로 유명했단다. 구한말 산홍(山紅)이라는 유명한 진주 기생이 있었는데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이 산홍을 첩으로 삼겠다고 나섰어. 그러자 산홍은 단칼에 거절해버렸지. “내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사람으로서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황현, 〈매천야록〉).”

 


진주 기생들이 다시 한번 그 강단을 발휘할 날이 왔어. 1919년 3월19일 마침내 기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섰단다. 남강을 따라 만세를 부르며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촉석루였어. 임진왜란 때 논개가 마지막으로 서 있었던 곳. 기가 막힌 일본 경찰이 칼을 빼들고 달려왔지만 기생들의 기세는 오히려 당당했다는구나. “기생 한 명이 부르짖어 말하기를 ‘우리가 죽어 나라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였다. 여러 기생은 모두 태연히 전진하여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일본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디 진주 기생만 기생이라던가’ 질세라 곳곳의 기생들이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오게 돼. 3월29일은 수원 기생들의 ‘위생 검사’, 즉 성병 검사 날이었어. 수원 권번 소속 가운데 두 번째 ‘왕언니’인 스물세 살 김향화를 포함한 수원 기생 33명은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지. 병원 가는 길목에 있던 수원경찰서 앞에서 그들은 갑자기 멈춰 선다. 우는 아이도 순사가 온다면 그치고 조선인들에 대한 매질이 합법이던 시절, 김향화와 기생들은 일본 경찰들이 입을 쩍 벌리게 하는 행동을 한다. 1918년 만들어진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고 기록된 김향화가 앞으로 나서서 독립 만세를 불렀고 나머지 기생들도 새된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거야. 경찰서 정문 앞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기생은 10여 명뿐

기생들이 이렇게 나올 줄 꿈에도 몰랐던 일본 경찰은 곧 잔인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어. 열다섯 소녀도 포함된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고 끌려가자 지켜보던 시민들도 울컥했지. 기생들의 독립 만세를 들으며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시위는 과격해졌고 돌이 날아가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어.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 장면. (기록화, 최대성 作, 독립기념관).

 

 

 


황해도 해주 기생이던 김성일, 문응순 등은 고종 황제 인산(因山·장례)에 참여하고 돌아왔어. 독립 만세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걸 보고 들은 그들은 무엇이든 해보자고 머리를 맞댔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서울에서 낭독된 독립선언서를 구하지 못했어. 이를 아쉬워하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가 없으면 잇몸이지. 우리가 써요!” 해주 기생들은 그들만의 독립선언서를 쓴다. “작은 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고 티끌 모아 태산도 이룩한다 하거든, 우리 민족이 저마다 죽기 한하고 마음에 소원하는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우리 한국은 세계 강대국들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 문제가 해결되고 말 것이다(국가보훈처 블로그 ‘훈터’).”

그들은 이 선언서를 무려 5000장이나 인쇄했어. 서울에서 천도교 조직이 총동원돼 인쇄한 독립선언서가 2만1000장이었으니 해주 기생들이 얼마나 작심하고 준비에 나섰는지 알 수 있겠지. 선언서는 인쇄했지만 태극기를 구할 수 없었던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태극을 그리고 사괘를 채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최은희도 만세를 부르다 해주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 기생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온몸에 멍이 들고 화상을 입어 시퍼런 맷자리는 구렁이를 칭칭 감아놓은 것처럼 부풀어 올라서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일본 경찰은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짓밟고 비틀고 때리고 찔렀어. “네까짓 기생 년들이 무슨 독립운동이냐. 도대체 너희를 선동한 사람이 누구냐. 이름만 대면 집에 돌려보낼 테다(최은희, 〈한국개화여성열전〉).” 이런 질문에 가장 멋지게 대답한 사람은 통영 기생 이소선이었을 거야. 판사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은 그녀는 이렇게 되묻지. “여자로서 본남편과 간부(姦夫·바람난 상대)가 있다면 누구를 섬겨야 하오?” “당연히 남편이지.” “내가 독립운동하는 건 여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요.” 판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고 해.

전국 곳곳에서 기생 수백명이 만세 운동에 몸을 던지고 더 많은 사람들의 용기를 불러일으켰으나 현재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기미년의 기생들은 10여 명에 불과하단다. 기생 출신임을 숨기고 사는 게 신상에 이로웠던 한국 사회에서 당연한 결과겠지. 수원 기생 김향화에게 수여된 훈장은 후손이 찾아가지 않는 임자 없는 명예로 남아 있단다. 달포 전 아빠는 가슴 아픈 기사를 하나 봤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부산에는 일본인을 상대로 한 매춘 산업이 번성했는데, 일본인을 손님으로 받아 생활하던 여성이 부지기수였다는구나. 그들이 딱 하루 일본인을 받지 않았는데, 물정 모르고 찾아오는 일본인들을 ‘이런 날 어딜 오느냐’고 내쫓았다고 해. 그게 3월1일이었어(〈중앙일보〉 2019년 2월16일자). 그날만은 자존심을 세웠던 거야.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겠노라 외치며 인간으로 우뚝 서는 날이었던 거야. 기미년 만세에 떨쳐나선 기생들이 한 인간으로, 한 자유민이자 자주민인 조선인으로 거리를 누볐던 것처럼. 아빠는 그들 모두에게 미안해진다. 기미년 100주년의 3월1일, 그들에게 고개 숙여 위로와 존경을 보낸다. 그래서 이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CN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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