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4대 국경일은 3·1절, 광복절, 제헌절, 개천절이었어. 아빠가 어렸을 때 음악 시간에는 4대 국경일 기념 노래를 배웠고 국경일 즈음의 조회나 기념식에서 어김없이 불러야 했단다. 국경일 기념 노래 4곡의 작사자는 한 사람이야.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그리고 문필가였던 위당 정인보라는 분이지. 개인적으로 아빠는 3·1절 노래 가사가 가장 감동적이다. 3·1운동의 전개와 의미 그리고 미래를 향한 다짐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야. 오늘은 그 가사를 되새기며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굵은 글씨는 정인보 선생이 지은 3·1절 노래 가사).

‘기미년 3월1일 정오.’ 사실 정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래서 가사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만 이미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는 준비되고 있었어. 서울보다 먼저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던 평양 장대현교회. 이곳에는 정오 무렵부터 우리 민족의 출애굽을 선포하려는 기독교인들이 어금니 깨문 채 모여 있었고, 그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도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려는 학생과 시민들이 집결하고 있었으니까.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1919년 3월1일 정오 평양 장대현교회에는 기독교인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려고 모여 있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선교사 번하이젤의 증언은 이래.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번하이젤 앞에 펼쳐진 것은 태극기였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표현해. 사나운 호랑이가 숲에서 나온다는 뜻이지. 숲속에서 잠자고 있는 듯 보였던 맹호는 포효와 함께 내달리기 시작했어. 3월1일 시위는 서울과 함경도 원산을 제외하면 대개 평안도에서 벌어졌지. 열띤 시위를 벌인 시위대 가운데 열네 살 소년도 있었어. 개신교 계열 중학교를 다니던 이 소년은 별안간 평양과 평안도 일대를 뒤덮은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지진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충격을 받아. 아마 짧은 시간 그는 실제 해방된 듯한 기쁨을 누렸을 거야.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겠구나, 머리가 하늘에 닿도록 뛰어다녔을 거야.

그는 곧 절망하게 돼. “여신도들이 거리에 모여서 찬송가나 민족 독립가를 부르고 있을 때 일본군이 그네들을 향하여 발포하는 것을 몇 차례나 목격하였다. (···) 그런데도 여신도들은 도망치지도 않고 조용히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계속 기도할 뿐이었다.”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었던 소년은 평화적 시위의 한계를 깨닫고 그 이후 무장 항쟁의 길로 나아가 공산주의 혁명가로 변신했지. 후일 중국공산당을 취재하러 온 미국 여기자 님 웨일스에게 자기 삶의 역정을 털어놓게 된 그는 〈아리랑의 노래〉 주인공 ‘김산’으로 역사에 남지. 3·1운동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새로운 가시밭길을 택했던 김산(본명 장지락)은 일본 첩자로 몰려 안타깝게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어.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1919년 3월1일, 그리고 그 후 전개된 결단의 나날은 장지락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꿨단다. 서울 동대문 안 고갯길인 창신동에 살던 청년에게도 3·1운동의 만세 소리는 벼락같이 들이닥쳤지.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글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찾았고, 예수쟁이가 되지 말라고 매를 드는 아버지 아래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강단 있는 사람이었지. 그는 고생 끝에 종업원 수십명을 거느린 철물점 주인이 됐어. 그리고 3·1운동을 겪으며 글자 그대로 성난 호랑이로 변신해. 경성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일본 경찰의 잔인한 진압이 계속됐지. 눈앞에서 한 일본 경찰이 여학생을 칼로 치려 하자 그가 눈에 불을 켜고 경찰에게 달려들어 때려눕혀버린 거야. 어엿한 철물점 사장님은 그예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길에 올랐어. 몇 년 뒤 의열단원으로 치열한 훈련을 거쳐 일본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 위해 경성에 잠입하지. 1923년 1월22일 일본 경찰 수백명(1000명이라고도 한다)의 포위망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붕과 지붕을 넘어다니며 끝까지 싸우다가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로 자결한다. 마지막 외침은 바로 기미년의 그것이었어. “대한 독립 만세.” 그의 이름은 김상옥이야.

“천만대에 기념할 민족의 부활일”
ⓒ합동통신조선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기록한 〈아리랑의 노래〉 초간본(왼쪽).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다 자결한 김상옥(오른쪽).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경상도 밀양에 아주 조숙한 소년이 살고 있었지. 1901년생이니까 나이 열 살에 경술국치를 겪는데 글쎄 이 꼬마가 아이고 데이고 대성통곡을 했다니 어이가 없을 만큼 조숙하지 않니. 그다음 해 열한 살 어린이는 학교를 발칵 뒤집어놓아. 친구들 몇몇과 함께 일본 천황의 생일을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재래식 변소에 처박아버리는 거사를 감행한 거야. 이 일로 그는 보통학교에서 쫓겨났어. 1919년 3월 그는 고종 황제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경성에 올라갔다가 만세 시위의 감동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서 밀양으로 내려온다. “우리도 이라고 있으면 안 됩니더. 3월13일 장날 보입시더.” 동지들을 규합한 열아홉 살 청년은 1919년 3월13일 밀양 장날, 장터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우렁차게 읽어내렸어.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 활동을 했고 국내에 들어와 신간회 조직도 꾸렸지. 다시 대륙으로 들어간 그는 조선의용군을 조직한 뒤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던 중 태항산이라는 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단다. 그를 위시한 조선의용군이 혈로를 뚫는 동안 덩샤오핑 등 중국 팔로군 지도부가 빠져나갈 수 있었어.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시오.” 마흔두 살의 독립운동가, 열 살에 일장기를 변소에 빠뜨리고 열아홉 살에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렸던 윤세주의 유언이었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3·1운동이 위대한 것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외면하던 자존심을 찾고 가슴속 깊숙이 구겨 두었던 자긍심을 치켜들었다는 데에 있어. “천만대에 기념할 우리 민족의 부활일(〈독립신문〉 1920년 3월)”이었던 것이지. 우리는 약하지만 비겁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힘겨워도 우리의 내일은 오늘 같지 않을 것임을 수백만 조선인이 선포했다는 뜻이야. 또 그 가운데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인생 경로를 바꾸었고 ‘독립’ 두 글자에 삶과 죽음 모두를 걸었어.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의 이름 석 자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기억해야 해.

곁들여 말하자면 3·1 정신은 ‘반일(反日)’이 아니야. 3·1절에 일본으로 여행 갔다 왔다고 욕설을 퍼붓고 사과를 하는 해프닝, “오늘만큼은 일식 요리를 만들 수 없다”는 일식집 주인의 결의는 3·1운동 정신과 전혀 관련이 없어. 선열들이 보면 오히려 웃을 일이라고 생각해. 3·1 정신은 단순히 이민족 일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주와 자유를 침해하는 이들에게 저항하는 정신이란다. 불의의 폭력에 주눅 들지 않고, 억눌린 자 고개를 들고 굽은 것을 바르게 펴내는 용기와 실천이란다. 100년을 맞은 3·1절, 아직도 시들지 않은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과도 맞서야겠으나 우리가 3·1정신을 발휘할 대상은 그 외에도 무지하게 많아 보이는구나.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