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여섯 번째 여성 감독이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역시 스스로 헤아린 적은 없지만 열 번째 이내의 여성 영화제작자다. 두 사람의 인연은 30여 년 전 임 감독의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둘 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역 여성 영화인이기도 하다.

임 감독은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고 동물보호단체 ‘카라’의 대표다. 곧 촬영에 들어갈 영화도 캐스팅 막바지 단계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역시 애니메이션 〈태일이〉를 제작 중이고 5월 중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바쁜 중에도 최근 1년간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든든)’의 공동대표를 맡으면서다.

든든은 여성영화인모임이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지원을 받아 꾸린 단체다. 2016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1년여 준비를 거쳐 지난해 3월1일 든든이 설립되었다. 영화산업 안의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과 피해자 지원을 비롯해 실태조사, 정책 제안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두 사람에게 든든의 1년과 여성 영화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물었다.


ⓒ시사IN 조남진
두 사람을 만나는 오늘, 하필 연예계 동영상 유포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임순례:사건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하나도 나아진 게 없구나, 너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은 유흥을 즐기고 연애하고 사적인 관계를 갖는 일에도 이렇게 위험이 크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 느꼈다. 그런 면에서 든든을 설립하길 잘했고, 영화인들에게 비빌 언덕이 된다는 게 시기적으로 적절하다고 느꼈다.

든든 출범 1년의 소회는?

심재명:출발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이 주도했고, 우리 둘 다 회원이다. 임 감독이 센터장을 맡아야 든든이라는 존재가 신뢰감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는 어렵다고 해서 2인 체제로 가게 되었다. 대중문화예술계 안에서 현역이 주체가 돼 성평등센터를 만든 게 처음인 걸로 안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고생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조직과 규정을 만들었다. 지난 1년이 앞으로 든든의 운영에 유의미한 경험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임순례:
실무자, 자문 변호사, 운영위원들이 거의 자원봉사로 영화계 여성들에게 보탬이 되려 애쓰고 있다. 다만 한계로 느끼는 것은 여전히 영화계가 좁은 커뮤니티이고, 그렇기 때문에 실제 발생하는 사건에 비해 신고율이 기대만큼 높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계만의 문제라기보다도 한국 사회 전반의 흐름과 같이 간다. 제일 어려운 점이다. 우리는 현장 1세대다. 제작 현장에서 우리보다 나이 많은 분이 거의 없다. 조직을 잘 만들어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심재명:30년 전에 영화사를 그만두고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이미연 감독이 유학 중이라 찾아갔다. 유학 중인 임 감독과 그때 프랑스에서 처음 인사했다. 임 감독이 귀국해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연출부 일을 했는데 내가 홍보를 맡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작품을 함께 한 동료이자 여성영화인모임 출발부터 같이한 동지다.

임 감독은 1994년 〈우중산책〉으로 데뷔하기 전부터 연출부 활동을 했고, 심 대표는 1988년 서울극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죽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을 것 같은데 당시 영화계 분위기는 어땠나?

ⓒ이상엽임순례 감독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 당시 콘티북에 성희롱 예방 생활수칙을 실었다.
심재명:서울극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여자가 들어왔다고 구경 왔을 정도다. 영화계에 젠더 감수성이라는 단어도, 인식도 없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는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강간이라는 형태로 성적인 묘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성을 꽃·과일에 비유하는 제목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한국 영화의 역사를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유신의 검열 속에서 창의력이 위축된 측면이 있었다. 여성을 비하하고 도구화하던 문화와 맞물려 있다. 내가 영화계에 들어오던 해에 최고 흥행작 제목이 〈매춘〉이었다. 3편까지 나왔다.

임순례:심 대표가 1980년대 전형적인 충무로 방식의 제작 시스템을 경험했다면, 1990년대 들어 새로운 형태의 자본과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도제 시스템에서 일하던 분들과 유학하고 온 젊은 영화인이 섞인 과도기였다. 전통적인 충무로 방식으로 일하는 영화사에서
잠깐 일을 했다. 연초에 회사에서 다이어리가 나오는데 연출부에 여자가 나 혼자였다. 스태프가 5명인데 수첩이 4개밖에 없는 거다. 수첩을 나눠주면서 ‘여자는 별로 적을 게 없으니까(일을 많이 안 하니까)’ 하면서 나를 빼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고 다른 연출부 남자들도 민망해했다. 그 정도로 인식이 부족한 시기였다. 여성 스태프들이 지금은 제작부, 연출부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스크립터 정도였다. 특히 스크립터는 여자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것도 편견이다. 여자가 꼭 꼼꼼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웃음). 감독을 옆에서 챙겨준다는 의미로 여비서처럼 여성 몫으로 할당했다. 미술·소품·촬영·기술은 여성 스태프가 드문 시기였다. 30년이 지나면서 성비 불균형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고임금 영역인 기술·촬영·조명 쪽은 여성이 더 많이 진출해야 할 분야로 남아 있다.

임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생존: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에 최초의 한국 여성 감독이 나온다. 1955년 〈미망인〉을 만든 박남옥 감독은 아이를 데리고 촬영장에 왔다고 들었다.

임순례:박남옥 감독은 남편이 있었지만 남성이 육아를 담당한다는 개념이 없어서 촬영장에 생후 4개월 아이를 업고 나왔다. 영화사 자본이 아니라 언니에게 돈을 빌려서 제작하다 보니 제작비를 아끼려고 직접 요리해 식사를 해결했다고 하더라. 제작, 진행, 감독 모든 걸 다 한 거다. 예전에는 필름을 싸들고 지방을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배급이 이루어져 아기를 데리고 기차를 타기도 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만들었지만 처음이 중요하다. 그 뒤에 다른 여성 감독이 나올 수 있었다.

ⓒ연합뉴스지난해 3월 ‘든든’ 개소를 맞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 및 성희롱 실태조사 발표회’가 열렸다.
과거와 비교해 현장에서 감독에게 요구되는 능력도 바뀌었을 것 같다.

임순례:전통적인 방식에서 감독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현장 장악력이었다. 수많은 스태프를 어떻게 불만 없이 끌고 가느냐 하는 일종의 리더십인데, 건설 현장의 ‘십장’처럼 굉장히 남성적인 문화였다. 여성스럽고 ‘여리여리’한 사람이 감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너무 여성스럽게 보이면 안 되겠구나, 유사 남성으로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여성성을 거세했다는 여성 감독 인터뷰도 있다. 술 잘 마시고, 남성들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야 데뷔하기 쉬운 분위기가 있었다.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영화제, 영상원 등이 생기면서 시나리오를 잘 쓰고 미장센을 잘 구현하는 원래 감독의 기능이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감독의 현장 통솔 능력이 상당 부분 제작부로 넘어가기도 했다. 얼마나 창의적인 재능이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심 대표도 많은 여성 영화인과 일했다.

심재명:처음부터 그랬다기보다는 영화를 만들면서 성인지 감수성이 자연스럽게 키워졌다. 처음에는 여성 영화인 고용 창출을 의식하지 않았다. 영화산업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나마저 남성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생각했다. 소수의 이야기,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여성의 시각을 담은 영화에 늘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성 영화인들과 많이 작업하게 된 것 같다.

든든은 지난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강사를 양성하고 92건의 교육을 진행했다.

심재명:자발적으로 교육받으려는 현장이 늘고 있다. 영화감독이 직접 교육을 받고 강사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중에는 남성 감독도 있다. 성폭력 상담과 중재, 해결에 따르는 법률·의료·심리 지원 업무도 하고 있다. 영화산업 실태조사도 했는데, 궁극적으로는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센터다. 1년간 교육을 하면서 느낀 점은 영화산업 안에서도 영화제, 영화사, 현장, 단체마다 업무 특성이 달라서 교육이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정·보완하려고 한다.

성폭력 상담은 72건이다. 피해자는 배우(46명), 가해자는 감독(16명)이 많았다.

임순례:지난 1년은 과거 사건이 많이 접수되었다. 사건 당시에는 신고할 곳이 마땅치 않았거나, 성폭력인 줄 몰랐다가 뒤늦게 깨닫게 된 경우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 바로 신고되는 건수는 적었다. 2차 가해도 많고, 신고해도 원하는 정도의 무거운 처벌이 어렵다는 인식도 있을 거다. 제일 큰 이유는 영화 커뮤니티가 너무 좁다는 점이다. 그 불신을 우리가 완벽히 해소해주지 못하고 있다. 든든만의 책임은 아니고 사회 전반의 문제다.

심재명:할리우드도 제작자·감독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발탁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최종 의사결정권자들이다. 피해자들은 2차 가해, 고용상의 부당한 대우를 두려워한다. 아직 든든의 존재를 잘 모르기도 한다.

임순례
:아직 1년밖에 안 됐다. 모범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선례가 더 많이 쌓여야 한다. 든든에서 법률 지원을 해주지만 소송을 하게 되면 결국 주체는 피해자 본인인데 안희정 사건의 김지은씨를 보더라도 개인이 싸움을 이어가려면 굉장히 큰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다. 내실을 다져 더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상담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은?

심재명:외부 기관의 지원과 조언을 받고 있다. 사건 종결까지 기간이 길고 2차 가해, 소송 등에 함께 대응해야 하는 게 어렵다. 어디까지 어떻게 중재해야 하는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든든의 역할과 권한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다.

임순례
:피해자나 가해자의 소속기관 안에 징계위원회가 있는지 여부, 구성원의 관심도 등이 다 다르다. 소속기관의 의지와 능력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다만 영화계에서 성폭력 문제가 생기면 든든과 상의할 수 있는 네트워킹은 이루어진 것 같다. 징계 절차에 대해 합리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계약서에 명시를 한다든지(성폭력을 저지를 경우 즉시 하차시키는 등) 하는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심재명:영화산업 내에서는 가해자도 캐스팅하지 않지만 피해자도 캐스팅하지 않는다. 목숨 줄과 연결되어 있는데 용기를 내기는 어렵다. 여성 연기자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도 용기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임순례:장자연 사건이 10년 넘게 해결이 안 되는 것은 가해자가 엄청난 권력자여서이기도 하지만 연예산업 안에서 은밀한 부분이 명쾌하게 밝혀지기 어려운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김기덕 감독 사건의 경우 그가 갖는 상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경종을 울리고 상징적 의미로 자리 잡아야 한다. 최근 일본 유바리 영화제에서 김 감독 작품이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든든은 페이스북에 유감 표명을 하고 영화제에서 1인 피켓 시위를 했다.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리틀 포레스트〉 촬영 당시 콘티북에 성희롱 예방 생활수칙을 실었다.

임순례:대본이 있지만 현장에서는 콘티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모든 스태프가 본다.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몇 번에 걸리나?” 하며 농담하는 스태프도 있지만 환기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다음 작품 때도 할 생각이다. 한 번도 안 읽어본 사람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다르다.

현장에서 젠더 감수성이 높은 젊은 여성들과 일하며 세대 차이를 느낀 적은 없나?

심재명: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럴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많이 배우기도 한다. 용기와 패기, 강렬한 문제의식을 갖고 발화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한다. 우리는 잘 몰랐거나 알고도 참거나 상대방을 생각해서 표현의 강도를 낮추는 자기 검열이 있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소신 있게 행동한다고 느낀다. 페미니스트 안에서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도 나오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SNS에서도 젊은 페미니스트들 위주로 많이 팔로하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

임순례:영화 현장에 20~30대 여성이 많지만 자신의 페미니즘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정해진 매뉴얼과 문화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오히려 동물보호단체 카라에서 일할 때 달라진 걸 느낀다. 5층이 사무실인데 사료나 무거운 걸 나를 때 어떤 활동가가 “남자분들 내려가주세요”라고 무심코 말하면 여성 활동가들이 “왜 남자라고 말하냐. 나를 수 있는 힘 있는 분들 나와달라고 말하면 안 되느냐”라고 한다. 여성, 동물, 사회적 약자를 표현할 때 무심코 범하는 오류를 스스로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더라. 일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영화판이 사회의 다른 분야보다 더 남성 중심적인 편이라고 생각하나?

심재명:체육계, 문학계, 대기업 성폭력 사건을 보면 그쪽이 더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임순례:영화계가 역설적이게도 산업적인 부분에서 효율과 합리성을 중시하다 보니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인 측면이 많이 거세됐다. 영화인들 중에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도 많아서 다른 분야보다는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주목도가 높은 사람들이 있으니 다르게 인식되는 것 같다. 성폭력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이슈지만, 든든은 성차별이 없는 노동환경을 만드는 데 주목하고 있다. 남자 감독, 배우들도 든든을 응원한다. 성평등한 환경을 만드는 일에 우리의 포커스가 있다.

성평등 관점에서 한국 영화의 변화를 체감하나?

심재명:‘알탕 영화(남성 배우가 많이 나오는 영화)’라는 표현을 쓰지 않나. 그런 영화가 반드시 흥행한다는 공식도 깨져가고 영화 속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대사·표현이 잘못되면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창작자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디즈니가 처음부터 페미니스트였겠나? 한국 영화계도 최근 1~2년 사이 대사를 쓸 때 여성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 〈미쓰백〉이나 〈허스토리〉 단체관람, 〈VIP〉와 〈청년경찰〉 불매운동처럼 여성 관객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도 달라진 풍경이다. 시민운동처럼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영화를 불매하고 여성 영화를 지원하고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선봉장으로서, 영화산업 내에서도 종사자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영화계에서 여성은 여전히 적은 숫자다.

심재명:임 감독은 극영화로 치면 한국 영화사에서 여섯 번째 여성 감독이다. 1955년부터 1994년까지 40년 동안 임 감독을 포함해 여성 감독이 6명 있었던 거다. 지금은 상업영화계에서는 5~10%, 독립영화를 합하면 20% 정도가 여성 감독이다. 박남옥 감독 데뷔 때는 스크립터를 ‘스크립트 걸’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다. 누적 여성 감독 숫자가 100명은 넘을 것이다.

한 여성 감독과 했던 인터뷰가 기억난다. 여성이라 투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통계상 열악한 상황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임순례:그 점은 다양성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한국 영화시장은 다양한 영화가 살아남기 어려운 지형이다. 대부분의 여성 감독이 예산이 큰 블록버스터보다는 중간 지대에 자리하기 쉬운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더 여성 감독들이 힘을 얻기가 어렵다. 배급·제작 구조 자체가 너무 극단적인 게 가장 큰 문제다.

심재명:‘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지난해부터 영진위에서 성인지 지표를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여성이 주인공·감독인 영화의 수익률이 남성 감독보다 못하지 않다는 게 수치로 증명됐다. 계속 수치화하고 계량화하면서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독과점 문제도 같이 돌파해야지 개인이 잘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든든 활동이 두 사람에게 어떤 경험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임순례:안희정 사건이나 버닝썬 사건을 보면 한국 사회의 갈 길이 요원하고 낙후되어 있음에 절망하게 된다. 김기덕·조재현 사건의 과정을 보면 개인이 오롯이 돌파하기 어렵다는 걸 체감한다. 그래서 든든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개인과 단체가 노력한다 해도 사회 전반적인 인식 변화가 함께 가지 않으면 힘들다는 점도 절감하고 있다.

심재명:이렇게까지 많은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고 책임감을 무겁게 느낀다. ‘손을 잡아준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면서 벅찬 일들을 이겨나가려 하고 있다. 성평등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나. 한국 영화계에서 책임을 함께 나누면서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려는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중요한 일 같다. 곧 SNS에 풀릴 1주년 응원 영상을 편집하고 있는데 안성기, 문소리, 한지민, 한예리, 안재홍 등의 배우가 함께해주었다.

올해 든든의 활동 계획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다면?

심재명:영진위와 함께 실태조사, 정책 개발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고 싶다. 정책을 제안하고 입안해서 실행하는 것까지 올해 안에 다 하기는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해나갈 것이다. 지난해 영진위에 20년 만에 소위원회가 생겼다. 성평등 소위원회다. 공조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하고 싶다. 미투 운동 이전부터 이미 센터를 만들자는 움직임은 있어왔다. 경제 규모나 소득 수준에 비하면 한국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나 여성을 바라보는 왜곡되고 폭력적인 시각은 놀라울 정도다. 버닝썬 사건은 소수 연예인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 성폭력, 마약, 검경 카르텔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바꾸는 것이 어렵고 요원한 일이긴 하지만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 민주국가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