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삶의 궤적을 바꿔놓는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차라리 그때 죽는 시늉을 했더라면.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의 이야기다. 2014년 12월5일, ‘땅콩회항’ 이후 그는 사무장에서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되고 공황장애와 두부 종양을 앓게 되었다. 기내 사무장이 일반 승무원이 되는 것은 사단장이 일등병이 되는 것이다. 〈시사IN〉 제592호(2019년 1월 22일)에 실린 엄기호와 박창진의 대담 ‘고통은 끝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는 웬만한 사회학 논문보다 가치 있고, 박창진의 〈플라이 백-갑질로 어긋난 삶의 궤도를 바로잡다〉(메디치 미디어, 2019)는 웬만한 사회학 저서보다 낫다.

박창진 전 사무장이 5년 동안 겪은 고행은 단순히 갑과 을의 투쟁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고행은 ‘조현아 대 박창진’의 싸움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렇게 아는 한 박창진의 고행은 끝나지 않는다. 또 그렇게 아는 한 우리는 결코 방관자 이상이 되지 못한다. 〈플라이 백〉은 ‘갑질’의 희생자가 당하는 을의 고통이 갑이라는 원천에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을은 갑이라는 원천은 물론이고 ‘갑을 사회’라고 명명될 수 있는 구조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날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은 마카다미아(견과류의 일종) 서비스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여승무원을 질타했고, 기내 서비스 매뉴얼을 설명하는 박창진 사무장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분노를 조절할 줄 모르는 조 부사장은 활주로에 진입 중인 비행기를 뒤로 되돌려 박 사무장을 기내에서 내리게 했다. 조 부사장은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경영자라면 도저히 할 것 같지 않은 행동으로 피소되었다. 기장의 권한을 무시한 항로 변경에 관한 죄(항공보안법)와 박 사무장에 대한 폭행과 강요죄다.


ⓒ이지영

가해자는 조현아이고, 피해자는 박창진이다. 그러나 사건 직후 감독기관인 국토교통부에서 진행된 조사는 그렇지 않았다. 대한항공에서 국토교통부로 옮겨간 K 조사관은 조 전 부사장이 욕설을 한 바가 없으며, 부하 직원이 실수를 해 상사가 언성을 높여 질책을 했다는 대한항공 측 진술을 받아들였다. 이 조사에서 박 전 사무장은 조 전 부사장의 지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비행기에서 내린 것으로 되었다. “국토교통부 조사는 전·현직 대한항공 임원이 말을 맞춰 짜고 치는 쇼였을 뿐이다.” 서부지검으로 자리를 바꿔 진행된 조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검사실 조사관들의 말투는 위압적이었고 피해자인 박 전 사무장을 “강력범죄자들을 다루듯” 했다. 그러나 대한항공 법률팀 변호사와 임원을 대동한 여승무원(사건의 발단이 된)과는 농담까지 섞은 대화를 나누었다. 변호사 대동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박 전 사무장은 자리를 박차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조사관들은 그를 잡으러 달려오며 소리쳤다. “야, 이 ××가….
거기 서!”

검사실을 박차고 나온 박창진이 제일 먼저 도움을 청한 곳은 그 자신이 인터뷰 요청을 몇 번이나 거절한 KBS의 ㅎ기자였다. 하지만 언론에는 신뢰를 주는 기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밤낮 없이 전화를 걸고 현관문을 두드리며 그의 이름을 불러대는 언론사의 잘못된 취재 관행은 접어두기로 하자. 그보다 더한 것은 인터뷰와 취재를 하고도 ‘광고주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보도를 축소하거나 아예 무산시킨 것이다. 또 어떤 기자는 박창진이 대한항공을 상대로 5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기도 했다. 그가 제기한 소송액은 고작 2억원이었다.

짓밟히지 않으려는 자만이 모욕을 받나니

자살을 결심해야 할 만큼 박창진의 개인적 삶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은 국토교통부 조사관도, 서부지청도, 언론도, 조현아도 아니다.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상사와 동료 직원들이 장본인이다. 이들은 피해자인 박창진에게 모욕과 망신을 주는 것으로 조직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했다. 이뿐이 아니다. ‘피해자의 순수성’을 감별하겠다며 ‘악성 댓글’을 다는 무수한 누리꾼도 갑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에서 “우리 사회의 시급한 문제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품위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문명화된 사회가 구성원들이 서로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면,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는 주장을 펼쳤다. 우리나라 현행법은 항공사를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함으로써, 항공사 직원들의 파업을 제한적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들 업종은 파업 시 참여 인원이 제한되는 등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사용주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파괴력(협상력)을 상실한다. 이 때문에 ‘항공사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어봤자’라는 무력감에 빠진다면, 이 업종의 종사자들은 사주의 모욕에 맞서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플라이 백-갑질로 어긋난 삶의 궤도를 바로잡다〉
박창진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2017년 12월21일, 대법원은 조 전 부사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그리고 2018년 1월13일, 조 전 부사장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공식 성화 봉송 주자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뒤따르는 성화 봉송 지원 주자로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냈다(두꺼운 얼굴!). 박 전 사무장이 5년 동안 겪은 고행이 ‘조현아 대 박창진’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 독자들은 명백히 알게 되었다. 사회 전체가 모욕에 대해 무감각하면서, 모욕을 가하는 자에게는 관대하다. 우리는 내 얼굴을 짓밟는 파시스트를 사랑한다. 실로, 짓밟히지 않으려는 자만이 모욕을 받는다.

로버트 서튼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너무 고상해서, 인쇄하여 발표하는 글에 이런 지저분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The No Asshole Rule〉이라는 책을 썼다. 〈또라이 제로 조직〉(이실MBA, 2007)으로 번역된 이 책에서 지은이는 ‘또라이’ 같은 최고경영자나 임원을 모시게 된 직장 구성원들은 정신적·신체적으로 병들 뿐 아니라 창조력과 책임감마저 말살된다고 말한다. 또라이 때문에 기업이 치러야 할 ‘또라이 세금’은 만만치 않다. 인간에 대한 양식과 품위가 지켜지는 일터는 마치 환상처럼 여겨지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자면 “공포 분위기에 물들지 않은 기업은 탁월한 인재를 끌어당기며, 이직으로 인한 손실을 낮추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파괴적인 내부 경쟁을 줄임으로써 외부 경쟁에서 승리를 맛본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기업은 엄청난 경쟁력을 얻는다.” ‘또라이’ 없는 직장을 만들기 위해 지켜져야 하는 단 하나의 법칙은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