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가운데)이 2월7일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 뒤 북한도 미국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한반도 비핵화를 포함한 4개항에 합의하고 비핵화 돌파구 마련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온 북·미 양국이 하노이 회담 이후 ‘올 스톱’ 국면으로 들어섰다.

워싱턴 외교가의 관심사는 미국의 전격적 태도 변화와 향후 파장에 쏠려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을 고작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까지도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특별대표)는 북한의 ‘단계적·동시 행동’ 방안에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뒤 미국은 이를 철회하고 전면 비핵화로 선회한 상태다. 비건 특별대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표적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나아가 지난해 서너 차례 평양을 드나들며 왕복 외교를 벌인 협상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모두 한목소리다. 더구나 싱가포르 회담 후 줄곧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과시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침묵 모드다. 하노이 회담장을 아무런 합의 없이 걸어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에 미국 내에서 오히려 긍정적 반응이 나왔다. 이에 따라 워싱턴 외교가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북핵 해결보다는 ‘상황 관리’에 들어간 것 아니냐고 관측하기도 한다.

미국의 태도 변화는 파격적이다. 지난 1월31일, 비건 특별대표는 스탠퍼드 대학 부설 아시아태평양문제연구소에서 “북·미 양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사항들을 동시적이고 병행적으로(simultaneously and in parallel)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연설했다. 이를 두고 워싱턴 외교가의 대다수 전문가들은 미국이 결국 북한의 주장인 ‘단계적·동시 행동’을 받아들인 것으로 판단했다. 게다가 비건 특별대표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강조하면서도 “상대가 모든 것을 마칠 때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조치에 따라 FFVD 전이라도 제재 해제에 응할 수 있다는 뜻까지 시사한 것이다.

비건 특별대표는 하노이 회담 직후인 3월1일 필리핀 마닐라 페닌슐라 호텔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결렬 사유’를 언급했다. 이때도 강경 기조로의 변화를 시사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월7일 국무부에서 열린 배경 설명회를 통해 기조 변화를 뚜렷이 천명했다. 언론에 ‘국무부 고위 관리’로 표현된 비건 특별대표는 “행정부 내에서 아무도 단계별 접근(step-by-step approach)을 옹호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비핵화다”라고 못 박았다. 3월11일 그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설에서 “미국은 비핵화를 점진적으로(incrementally) 추진하지 않겠다”라고 천명했다. ‘단계별’이든 ‘점진적’이든 본질은 같다. 북한의 단계별·동시 행동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비영리 연구소 국가이익센터(CNI)의 해리 카지아니스 한국국장은 “불행히도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 기조를 바꾼 것 같다. 하노이 회담 뒤 정확히 행정부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은 없지만 미국이 골문을 움직인 게 분명하다”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국의 전격적 태도 변화를 촉발한 것일까? 일각에서는 확대 정상회담에 참석한 강경파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중앙정보국장 출신 폼페이오 장관을 주목한다. 지난 2월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볼턴 보좌관과 폼페이오 장관은 비건 특별대표의 유화적 대북 접근에 회의적인 견해를 표시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정상회담 이전 시시각각 비건 특별대표한테 실무협상 상황을 보고받은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 때 북한 측 당혹”

정통한 미국 외교 소식통은 “북·미 양측 실무협상이 막판으로 치닫던 즈음 일본 고위 관리들을 하노이에서 비공개로 만난 비건은 북측과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했다”라고 밝혔다. 협상 난기류를 파악한 두 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핵심은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변심이다. 북한 전문가들을 위한 트럼프 행정부 관리의 비공개 브리핑에 참석한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테리 연구원은 브리핑 담당 관리의 말을 인용해 “행정부 인사들 모두 북한이 핵 포기 의사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하노이 회담을 통해 마침내 그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워싱턴포스트〉에 밝혔다.

실제로 확대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핵무기는 물론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생물화학무기까지 모두 포괄하는 ‘대량살상무기(WMD)’ 카드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던진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은 위원장의 반응이 부정적이자 트럼프 대통령도 공동성명 합의 거부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비건 특별대표는 최근 의회 보좌진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폐기와 유엔의 대북제재 해제를 골자로 한 북한의 제의를 거부했을 때 북한은 달리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고, ‘플랜 B’를 마련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라고 밝혔다. 북한 측이 매우 당혹스러워했다는 의미다.

미국 내 정치적 요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 뒤 트럼프 행정부는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우군인 공화당, 그리고 주요 언론들로부터도 ‘부실 합의’라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번 하노이 회담 직전에도 댄 코츠 미국 국가정보국장을 포함한 정보 관련 기관장들은 의회 증언에서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에 공개적으로 회의감을 표시했다. 내년 11월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로 더는 점수를 잃어서는 안 될 처지였고, 이에 따라 공동성명 합의 결렬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백악관 외교안보 참모들도 하노이에서 귀국한 직후 의회와 언론을 상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불만족스러운 합의에 응하지 않고 회담장을 나온 사실을 집중 홍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변심에 대해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 한 외교 소식통은 “비건의 발언을 놓고 미국의 태도 전환이라고 보는 건 무리다. 전면적 비핵화로 이어지는 로드맵이 나오면 그 틀 안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동시 행동까지 트럼프 행정부가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북한이 비핵화 로드맵의 필수 전제인 핵 신고에 부정적이어서 실현 전망이 어둡다.


미국이 이처럼 강경 모드로 돌아서고, 북한도 기존의 단계적·동시 행동에서 물러서지 않을 경우 비핵화 협상은 장기간 공전이 불가피하다. 양측 모두 협상의 여지는 남겨뒀지만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3월18일 북한과 대화 재개를 희망하면서도 FFVD의 일환인 북한의 ‘검증된 비핵화(verified denuclearization)’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표현 역시 ‘전면 비핵화’ 기조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험로를 예고한다. 최근 비건 특별대표의 브리핑에 참석한 의회 보좌관이 〈워싱턴포스트〉에 “북한도 강경 입장이고, 미국도 지금처럼 강경 발언을 내놓는다면 양측 모두 협상 테이블로 복귀하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라고 밝힌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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