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명신인 오성 이항복의 후손들, 즉 경주 이씨 가문의 백사공파는 정승을 10명 가까이 배출한 조선 후기 명문가로 그 이름이 높다. 대한제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던 즈음에도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직계 후손들은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지닌 최고 명문가로 번영하고 있었단다. 나라가 망한 뒤 이 명문가의 여섯 형제와 그 가족 수십명은 가문의 땅을 다급히 처분해 장만한 전 재산을 들고 식민지 조선을 떠났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조상들이 물려준, 또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길이 보전해줄 수 있는 기득권을 내던져버린 거지. 그 가운데 다섯째 이시영은 여섯 형제 가운데 가장 촉망받는 인재였어.

1885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이시영은 20대에 당상관에 진입하는, 그야말로 초엘리트 관료 코스를 걸었지. 그는 장인인 김홍집이 아관파천 이후 역적으로 몰려 난민들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0여 년 만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외부(外部) 교섭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뜻밖의 일에 직면해. 외부대신 박제순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조약 초안을 들고 온 거야. 을사늑약이었지. 이시영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강력히 경고했어. “이 조약은 우리 국가의 주권을 없애는 것이고 망국멸족의 장본이라… 외부대신으로서 마땅히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만약 자신의 이해관계로 국가 대사를 그르친다면 만세죄역(萬歲罪逆)이 될 것입니다(여시동, 〈인간적인 책〉).”


ⓒ주한미군 제공1950년 10월24일 유엔의날 기념식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는 이시영 부통령.

박제순은 유약한 사람이었어. 반대 시늉을 하는 것 같더니 이토 히로부미가 눈 한번 부라리자 이내 뜻을 꺾어버렸으니까. 이시영은 격노해 ‘만세의 죄인’이 되어버린 상관에게 선언한단다. “역적의 집안과 혼사를 맺고 싶지 않소. 파혼이오.” 이시영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 간에 혼담이 진행 중이었거든.

나라의 명맥이 끊긴 뒤 이시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는 위에서 말했듯 모든 재산을 탈탈 털어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어.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온 청년들에게 어찌 수업료를 받겠느냐는 것이 이씨 형제들의 뜻이었고, 아낌없는 투자 덕에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해냈어.

아무리 이씨 가문의 재산이 많았다 하더라도 독립운동이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보다 더 기약 없는 일이었어. 1916년 이시영의 부인 박씨가 과로로 쓰러져 그예 숨을 거두고 만 일은 시작에 불과했어. 조선 최고의 거부였던 이씨 집안 형제들은 영양실조로, 병으로, 또 일제의 만행으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제 35년을 끝내 살아내고 일본의 패망을 본 건 다섯째 이시영뿐이었지.

이시영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 때 법무총장으로 임명된단다. 그 시점에서 상하이에 좌정한 임정의 국무위원은 거의 이시영 혼자였어.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에,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이동휘는 러시아에 가 있었고, 신규식은 투병 중”이었으니까. 국무위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서막을 열어젖힌 사람이 바로 이시영이었던 셈이야. 이시영은 곧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이 되었어. 가난한 조직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것만큼 고달픈 일도 없지. 그 와중에 이시영은 자신의 가족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어.

“내 재산 찾으려 독립운동한 게 아니오”

심지어 만주를 떠나 상하이로 건너올 때 그는 어린 아들들을 버리고 오다시피 했고, “셋째와 넷째는 아버지가 임시정부를 따라 떠나자 만주에서 구걸하다 두 살, 세 살 때 아사했다(〈조선일보〉 2011년 6월7일).” 둘째 아들 이규열은 가족을 모두 잃은 뒤 ‘상하이에 아버지가 있다’는 가냘픈 믿음 하나로 무작정 중국 대륙을 관통하여 상하이로 갔고 아버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됐다고 해. 아무리 임시정부라지만 어쨌든 재무총장이면 ‘돈을 만지던’ 사람이야. ‘독립 공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모으고 독립 공채에 고액을 기부한 이들에게 보낸 감사장도 여럿 남아 있어. 그런 재무총장의 아들들이 비참하게 굶어 죽어갔던 거야.  

ⓒ연합뉴스이시영 선생의 며느리 서차희씨(오른쪽)와 그의 막내딸 이재연씨.

조선으로 돌아갔던 장남 규창이 이규열의 결혼을 주선했고 이규열은 고국에 돌아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 결혼식은 합법적인 독립운동 자금 모금의 장으로 변한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가 주례를 보고 개성 부자 김홍조를 비롯한 유력 인사들이 거금을 쾌척한 가운데 이규열 부부는 “신혼생활을 즐길 새도 없이 혼인 보름 만에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떠나서 아버지와 각지에 흩어진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났다”고 하는구나(〈연합뉴스〉 2010년 2월28일자).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면서 축의금은 몽땅 ‘가로채’ 임시정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그는 해방 공간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연장자라 할 만했어. 이승만 대통령이 형님, 또는 성재(省齋·이시영의 호) 어른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이 박사(이승만)는 양보성이 있어주길 바란다… 태산과 같은 중임을 지고 나가는 데는 좀 벅찰 것”이라거나 “김규식씨는 좀 견고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경향신문〉 1948년 7월4일자)”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을 테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그가 소유했던 옛 토지의 일부나마 되찾아주겠다고 했을 때 이시영은 딱 잘라 대답한다. “내 재산 찾으려고 독립운동한 게 아니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시영은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당선됐어. 한국전쟁 와중에 일부 장교들이 장정들에게 돌아갈 군수품을 착복하여 수만명을 굶겨 죽이고 얼려 죽인 국민방위군 사건에 직면했을 때 그는 벼락같은 노호를 내지르며 부통령직을 내던져버린다. 그의 사임 연설을 되새기다 보면 한 강직한 인간의 결이 보이고 그 숨이 느껴져. 나이 여든을 훌쩍 넘긴 조선의 선비이자 대한제국의 신료이며 임시정부의 서막을 열고 막판을 매조지했던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 하되 고칠 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대한민국 부통령까지 지낸 이시영이지만 그 후손들은 끈질기게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고 이시영의 묘는 방치되다시피 했단다. 묘 옆의 무허가 주택에서 수십 년 동안 묘를 돌본 이는 이시영의 며느리 서차희씨였어. 자신들의 결혼 축의금을 몽땅 싸들고 상하이로 달려갔지만 존경스러웠던 시아버지의 묘를 그는 떠나지 않았어. 기초생활 수급자로 근근이 살았던 서차희씨는 2013년 10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며느리를 저승에서 만났을 때 대한제국 평안도 관찰사, 외부 교섭국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은 뭐라고 했을까. “아가, 미안하구나. 이제는 내가 갚아주마” 하며 쌈짓돈이라도 손에 쥐여주지 않았을까. 문득 그 만남을 상상하다 보니 가슴이 더워오는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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