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주에 있는 한 정부 산하기관에서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폐기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원하면 교육용으로 줄 수 있다고 했다. 처음 사진을 배우는 학생들이 기계식 카메라를 사용해보면 카메라 메커니즘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카메라 10여 대를 무작정 가져왔다. 작동되지 않는 카메라가 반 정도 되었다. 그래도 나머지 반은 낡은 ‘전투 카메라’임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지역 노동인권센터에서 사진을 배우는 이들과 카메라를 보고 있는데, 젊은 변호사가 “혹시 여분 있으면 한 대 주면 안 되겠냐”라고 묻는다. 다 찌그러진 카메라를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거 박보검 카메라예요. 저도 한 대 갖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박보검 카메라? 인터넷을 찾아보니, 배우 박보검이 한 드라마에서 이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녔다고 한다. 관련 글을 자세히 읽어보니, 박보검은 드라마에서 잘생긴 외모 이외에 두 가지 다른 이유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 하나는 사자 갈기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헤어스타일이고, 다른 하나는 극중 연인 송혜교와 쿠바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구식 필름 카메라다. 둘 중 대중의 시선을 더 끈 건 무엇일까? 카메라였다.

ⓒKodak물리와 화학이 결합된 전통 필름 사진은 사진 제작 과정 전체를 작업자가 완벽하게 통제해야 한다.
아래는 1898년에 출시된 코닥의 뷰카메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능을 장착한 디지털카메라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웬 구식 필름 카메라? 필름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이었던 그 카메라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한동안 충무로 중고 카메라 시장에서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였다. 박보검 카메라와 관련된 어떤 기사는 필름 카메라에 대한 인기로 필름 시장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디지털과 필름의 차이는 ‘기다림’

카메라가 모든 걸 다 해주는 디지털 시대에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나도 박보검처럼 멋있고 싶다’는 격렬한 몸부림이라면 사진을 가르치고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박보검 카메라’라는 인기 현상이 많이 아쉽다. 사진가가 필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슬로 라이프를 유행처럼 즐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찍힌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없는 필름 시대 사진가는 최종 결과물을 최대한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적절한 노출과 현상, 인화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

많은 이가 디지털과 필름의 차이를 ‘기다림’에서 찾는다. 필름 사진의 기다림은 또 다른 차원의 ‘천천히 감’이다. 거리 사진가 게리 위노그랜드는 찍은 사진을 몇 달, 때로는 몇 년 후에 현상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찍었을 때의 주관적인 느낌을 잊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필름 사진의 기다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박보검이 송혜교를 기다리는 심정보다 더 의미가 깊다는 말이다. 드라마 작가는 박보검에게 필름
카메라를 주고는 ‘아주 오래된’ 사랑을 주문했는지 모르겠으나, 필름 카메라의 인기가 잠시 왔다 가는 복고의 문화적 코드로 그치지 않고 좀 더 많은 사람이 사진의 의미를 음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주 오래된 나무에서 꽃이 핀다. 봄이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