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아 디비뿌라!” 4월3일 밤 11시20분께, 정의당 여영국 후보 캠프에서 한 지지자가 외쳤다. 개표율은 94.02%. 이때까지도 여 후보는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에게 441표 뒤져 있었다. 현장이 뒤집어진 것은 5분여 뒤였다. 99.98% 개표 결과 여영국 후보가 0.5%포인트 앞선다는 텔레비전 뉴스가 나오자마자 캠프 관계자 전원이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개표 뒤 첫 역전, 504표 차 신승이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오열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이들이 속출했다. “정말 전쟁이었다” “아까는 지옥 같았다”라는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노회찬 의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우는 이도 있었다. 4·3 창원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승리한 정의당 선거사무소는 환희로 가득 찼다.

여영국 캠프는 4·3 보선을 “질 수 없는 선거”라고 규정했다. ‘져서는 안 되는 선거’라는 의미였다. 정의당에게 이번 선거는 단순히 의석 하나를 늘릴 기회가 아니었다. 창원성산은 고 노회찬 의원의 선거구였다. 캠프 인사들은 이곳 의석을 탈환하는 일이 노 의원의 뜻을 기리는 길이라고 여겼다. ‘노회찬’은 일종의 심벌이었다. “노회찬의 꿈, 여영국이 이어가겠습니다”라는 표어가 캠프 사무소에, 노 의원과 여영국 후보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걸개그림이 회의실에 붙어 있었다. 유세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는 누구든 “반드시 승리해 노 의원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한 당직자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노 의원 얘기가 나오자 눈물을 글썽였다. 분위기는 결연했고 당 지도부는 독기를 품은 것 같았다. 이정미 대표는 2월부터 창원에 상주하면서 필요할 때만 서울로 갔다.

ⓒ시사IN 신선영창원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되자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운데)와 당 관계자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노회찬의 선거구’를 되찾는다는 상징적 의미만큼 의석 1석도 중요했다. 국회 교섭단체 지위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의석 6석인 정의당은 14석인 민주평화당과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이라는 공동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노회찬 의원 사망으로 필요 의석수(20석)를 못 채워 교섭단체 지위를 잃었다. 여영국 후보가 당선되면서 교섭단체를 다시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당선 직후 여영국 후보는 이 점을 ‘노회찬 정신’과 결부했다. “국회로 가서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 민생 개혁과 국회 개혁을 반드시 주도하겠다. 이것이 바로 노회찬의 정신을 부활하고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회찬 의원은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초대 원내대표를 맡은 지난해 4월2일 “처음으로 사람대접 받은 것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황교안 대표, 인기는 좋았으나…

질 수도 있는 선거였다. 선거운동 기간 막판에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3월25일 민주당 권민호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한 뒤 여영국 후보는 줄곧 여론조사 1위를 유지했다. 2위와 격차가 15%포인트 이상 벌어진 조사도 있었다. 그런데 투표 이틀 전 여영국 후보 선거대책위원회는 ‘48시간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이정미 대표는 이날 “여론조사 공표 금지 후 여러 위기상황이 감지된다. 보수 표는 강하게 결집하고 민주·진보는 느슨하게 이완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창원 안에서도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 택시기사는 “여기는 진작 여영국 당선으로 결정 났다. (선대위는) 방심하지 않기 위해 엄살을 부리는 거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투표 전날 정호진 대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에서 온 기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지역 언론에서는 ‘정의당 판단이 맞다’는 말이 나온다. 자유한국당은 보수 세력을 총동원하고 있고, 민중당 손석형 후보 측은 ‘어차피 여영국 당선이니 소신 투표하라’고 설득한다. 내부 집계 결과 심상치 않다.” 개표 결과를 보면 이 위기의식은 정확했다.

ⓒ시사IN 신선영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 선거운동에 나선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오른쪽부터).
자유한국당도 총력을 다했다. 황교안 대표를 비롯해 나경원 원내대표, 조경태 최고위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태호 전 경남지사 등이 총출동했다. 특히 황교안 대표는 열성적이었다. 3월 말 창원에 원룸을 얻었다. 황 대표에게 이번 선거는 2020년 총선 지휘관의 역량을 증명할 무대였다. 선거운동 기간 막바지 황 대표는 강기윤 후보의 유세 일정에 대부분 동행했다. 투표 전날 밤 11시에는 후보 없이 홀로 시내버스 차고지에 가서 버스 기사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황교안 대표는 인기가 좋았다. 시장 유세에서 고령 유권자들은 앞다투어 그의 손을 잡고 덕담을 건넸다. 오히려 강기윤 후보는 뒤로 밀리는 일이 잦았다. 취재진도 황 대표에게 몰렸다. 투표 전날 저녁 퇴근길 유세에 강 후보보다 먼저 도착한 황교안 대표는 홀로 즉석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카메라 세례가 집중되자 황 대표는 “깜짝 미팅을 할 생각이었는데 쉽지가 않다”라면서 웃었다.

투표 전날 만난 강기윤 캠프의 한 실무자는 이러한 ‘공중전’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당 지도부의 방문이 선거에 도움이 많이 됐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슈 분산이었다. “창원은 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기업들이 타격을 받은 곳이고, 자영업자 비율도 높다. 경제에 불만이 많다. 강 후보는 본인이 직접 다니면서 지역 민심을 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중앙정치 이슈가 본질을 흐렸다. 가령 몇몇 의원들의 5·18 관련 발언이 여론에 영향을 주는 게 보였다.” 물론 황교안 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 인사들이 유세에서 주로 강조한 것도 민생·경제 문제였다. 하지만 인지도 높은 중앙당 인사들이 현장에 오래 머물자 자유한국당의 강한 이념 성향이 강 후보에게 덧씌워졌다는 말로 풀이된다. 유세 중에 ‘사고’도 터졌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4월1일 노회찬 전 의원을 두고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분” “(노회찬 정신은) 솔직히 말해 그렇게 자랑할 바는 못 된다”라고 말했다. “싸움꾼 대신 일꾼을 뽑아달라”는 강기윤 후보의 슬로건은 힘이 빠졌다.

ⓒ시사IN 신선영4월2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운데)가 정의당 여영국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여영국 후보는 ‘밭을 잘 갈아온 사람’

강기윤 캠프가 이념 개입을 경계한 까닭은 이 지역 특수성과 맞물려 있다. 창원성산의 정치 성향은 경남의 다른 지역과는 차이가 크다. 성산구에는 창원국가산업단지가 있어서 전통적으로 진보·노동 정당이 강세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당선된 게 시작이었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표가 갈린 19대 총선을 제외하고는 진보 정당이 내리 승리해왔다. 도의원 시절 여영국 후보의 선거구였던 사파동과 상남동 일대 주민들은 평균적으로 젊고 교육수준이 높다. 전체 선거인 수의 3분의 1에 달하는 이 지역에서 여 후보는 1위를 차지했다. 상남동은 52.9%, 사파동은 51.4%로 득표율 평균(51.2%)을 넘어섰다. 개표 중반 1위에게 5%포인트 이상 뒤처져 있을 때 여영국 후보 캠프 안에서는 “후보의 (도의원 시절) 선거구 표가 아직 많이 남았다더라”는 말을 위안 삼았다. 어떤 원인 때문이든 강기윤 자유한국당 후보는 이 지역까지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 실패했다.

후보 개인의 인기도 여영국 후보 쪽이 나아 보였다. 투표 전날 밤 11시, 당 지도부 없이 혼자 나선 창원중앙역 유세에서 두드러졌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후보의 악수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 한번 만나고 싶었다” “열심히 하시라”라는 말을 건네며 먼저 다가오는 이가 많았다. 자유한국당 유세에서 황교안 대표나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끌어내는 반응이었다. 정의당 캠프의 한 인사는 여영국 후보가 “밭을 잘 갈아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여 후보가 중앙정치에서 유명하지는 않지만 지역에서는 도의원 시절부터 인지도를 쌓아왔다. 홍준표 도정 때 무상급식, 진주의료원 문제를 두고 도지사와 ‘맞짱’을 뜬 야당 도의원이라는 기억이 주민 사이에 남아 있다. 지지세가 약한 주부층이 이 일로 여 후보를 기억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여·야 단일화도 성공한 셈이 되었다. 단일화는 강기윤 자유한국당 후보와 손석형 민중당 후보 양쪽에서 비판받았다. 자유한국당은 “여당의 2중대”, 민중당은 “노동 없는 야합”이라고 불렀다. 강기윤 캠프의 한 관계자는 “처음부터 단일화를 예상하긴 했다. 노회찬 의원이 사망해 치르는 선거인 만큼 모양새상 여영국 후보로 단일화할 것이라고도 예상했다. 그럼에도 여·야 후보 단일화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기괴한 장면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의당은 여당의 이점은 활용하고 정부 실책은 떠안지 않게 됐다”라고 말했다. 정의당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여영국 캠프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처음부터 단일화에 목맨 것은 아니다. 현장만 나가면 ‘언제 단일화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후보 단일화는 합당이 아니다. 가령 탄력근로제처럼 우리 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어긋나는 정책은 적극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4월2일 정의당 지도부와 유세차에 함께 오른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도 정의당과 연대할 뜻을 밝혔다. 이 대표는 창원의 고용·산업 위기지역 지정 연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뒤 “앞으로도 정의당과 공조할 일이 많다. 내년 총선에서도 연대해 자한당 후보가 모조리 낙선하도록 만들자”라고 말했다.

단일화는 정의당 인사들의 유세 메시지에도 미묘한 영향을 끼친 듯했다. 상남동 사거리의 마지막 유세에 나선 심상정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경제는 괜찮다. 지난해 성장률은 2.7%로 선진국치고 나쁘지 않은 편이다. 어려운 것은 서민경제다. 자한당이 살리겠다는 경제는 재벌 경제고, 갑질 경제다.” 정의당은 민주당과의 공조를 내년 총선 전부터 수행할 계획이다. 정의당 신장식 사무총장은 ‘진보·개혁 입법블록’을 언급했다. “취임 뒤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약자를 위로한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도입을 비롯한 제도 개혁은 사실상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의당과 민주당의 입법 공조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이번 단일화가 그 주춧돌이다.”

기자명 창원/글 이상원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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