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양한모
엠넷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을 통해 한국 대중을 처음 만난 사쿠라에게 주어진 역할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 편이 순순히 무너지도록 두지 않겠다’는 의지에 불타오르는 일본 아이돌 최종 보스. 각본은 완벽했다. 준비된 격전지는 라이벌의 땅이었고,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본 참가자 전원은 이미 AKB48 시스템 아래 수년간 프로로 활동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계급장을 내려놓고 실력만으로 겨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성상 그것만으로도 평가에 유리할 것 하나 없는 감투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최근 수년간 눈에 띄게 벌어진 제이팝과 케이팝 아이돌의 실력 차였다.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본점’ 일본 아이돌과 완성도 높은 무대를 꿈꾸며 오랜 시간 연습해온 ‘분점’ 한국 아이돌 사이의 간극은 꽤 커 보였다.

논란을 불러온 사쿠라의 한마디는 이쯤에서 적절히 등장했다. “한국 분들은 일본에서도 인정받는데 일본 아이돌은 일본을 나가는 순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게 분하다.” 사쿠라가 말한 ‘분하다’, 즉 ‘구야시이(くやしい)’는 한국어에 비해 ‘아쉽다’ ‘속상하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단어였지만 제작진이 부러 택한 번역은 ‘분하다’였다. 의도는 그만큼 명확했다. ‘분하다’는 〈프로듀스 48〉이 사쿠라에게 부여한 일종의 의무이자 운명이었다. 심지어 AKB48의 후쿠오카 지역 그룹 HKT48 소속 시절부터 유명했던 사쿠라의 강렬한 눈빛과 타고난 근성은 이 드라마에 더없이 적합한 마지막 퍼즐이었다.

대부분의 일본 참가자가 F등급에 자리한 가운데 사쿠라만이 유일한 A등급을 받으며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그는 심지어 트레이너가 ‘픽’한 A등급이었다. 서서히 ‘악마의 편집’이 활약할 시간이구나 긴장하는 찰나, 다행스럽게도 사쿠라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는 극명한 실력 차를 겸허히 받아들인 뒤 쉼 없이 연습했고, 익숙하지 않은 한국어로 애써 완성한 무대를 선보이며 트레이너들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승부욕에 불타던 야망의 눈동자는 그 강렬함 그대로 경연을 준비하며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데뷔 7년차의 연륜에서 나오는 풍부한 무대 장악력과 완벽한 외모와는 달리 다소 허술한 성격도 유효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변화가 사쿠라 자신만이 아니라 프로그램 전반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한·일 아이돌과 그를 둘러싼 팬덤 간의 자존심 대결이 낳을 난장을 걱정했던 예상과 달리, 〈프로듀스 48〉은 참가자들의 국경을 넘은 경쟁과 화합의 장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그 예상치 못한 마무리에도 역시 사쿠라의 한마디가 있었다. 최종 2위로 호명된 뒤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사쿠라는 선발의 기쁨보다는 친구를 향한 깊은 애정을 표했다. “채연, 항상 같이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같이 데뷔하고 싶어요.” 이후 WM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채연은 사쿠라의 염원대로 아이즈원의 마지막 12번째 멤버가 되었다. 기적이라 해도 좋을 ‘사쿠라 매직’이었다.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는, 나아가 개척하는 자. 미야와키 사쿠라다.

기자명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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