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은 워싱턴으로 넘어왔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12일 시정연설에서 올 연말까지 미국의 태도 변화를 전제로 3차 북·미 정상회담 카드를 던지면서 미국의 향후 대응에 관심이 쏠린다. 미국은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뒤 종전의 단계적 북핵 해법에서 180° 선회했다. 북핵 전반의 일괄적 해체를 겨냥한 ‘빅딜(big deal)’로 기조를 바꾼 것이다. 김 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정조준한 것은 미국의 이 같은 빅딜 기조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 직후 트위터에서 그와의 친분을 강조하며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3차 정상회담이 열리면 좋을 것이다”라고 화답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3차 회담의 전제로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촉구하고 시한까지 제시한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런 전제나 시한도 내걸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의 핵무기와 대북 제재가 제거될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라고 말했다. ‘핵무기와 대북 제재 제거’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이 일괄적인 전면 핵 폐기를 북한에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대북 제재 해제를 제시한 빅딜을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3차 회담에 긍정적 견해를 나타냈지만 빅딜에 대한 미련도 시사한 셈이다. 이런 기조는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도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향후 다양한 스몰딜(small deal)이 나올 수도 있지만 현 단계에서 우리가 얘기하는 건 빅딜이다”라고 말했다.

ⓒReuter2월2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빅딜 진원지, 백악관 한반도 라인

하노이 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은 이른바 빅딜 문건을 직접 김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이 문건은 2차 북·미 정상회담 파국의 직접적 원인으로 알려졌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빅딜 문건의 핵심은 “북한의 핵 기반, 생물화학무기 프로그램 및 관련 시설, 탄도미사일, 발사대 및 부대시설의 전면 폐기”이다. 이에 추가적 요구까지 붙였다. ‘포괄적 핵무기 신고’ ‘미국과 국제기구 소속 사찰관이 북한 현지에서 검증’ ‘모든 핵 관련 활동 및 신규 핵시설 구축 중단’ ‘핵과학자 및 기술자의 민간 부문으로 이동’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으로 반출’ 등이다. 미국은 이런 요구들을 빅딜로 포장해 북한에 제시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빅딜과 관련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이상 트럼프 대통령과 외교안보 참모진이 3차 회담 성사를 위해 빅딜을 일부 수정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이런 가운데 우선 관심을 끄는 건 빅딜 문건 작성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한반도 라인이다. 하노이 회담 직후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ABC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인 〈디스 위크(This Week)〉에 출연해 문제의 빅딜 문건 작성자에 관한 질문을 받고 “해당 참모진이 작성했으며, 상부의 승인을 받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볼턴 보좌관은 구체적으로 참모진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 내용은 볼턴 보좌관이 북핵 해법으로 주창한 ‘리비아식’ 모델과 흡사하다. 현재 한반도 라인에는 사령탑인 볼턴 안보보좌관 밑에 대북 전담 핵심 참모인 앤서니 루지에로 보좌관, 매슈 포틴저 아시아담당 선임국장, 앨리슨 후커 한국국장이 포진해 있다.

이와 관련 존 메릴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분석실장은 “빅딜 문건과 관련해 볼턴의 핵심 참모로 대북 강경파인 루지에로를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루지에로는 국무부와 재무부에서 한때 북한 담당관과 금융거래 제재를 담당하는 부서 책임자로 다년간 근무한 사람이다.

그는 NSC에 합류하기 전까지 볼턴 보좌관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보수 단체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대북 문제에 대한 초강경 인식을 드러낸 바 있다. 지난해 7월 볼턴 보좌관의 낙점으로 그가 NSC에 합류하자 인터넷 언론 〈민트프레스뉴스〉는 “트럼프 행정부 내 일부 인사들이 대북 평화 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작심한 증거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루지에로의 인선이 가장 최신의 증거다”라고 지적했다.

포틴저 아시아담당 선임국장은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정보장교로도 근무한 전력이 있다. 볼턴 보좌관처럼 대북 문제에서 매파로 분류된다. 그는 아프간 근무 시절 마이클 플린 전 안보보좌관과 인연을 맺어 NSC에 들어왔다.

후커 한국국장은 국무부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정보조사국(INR)에서 대북 분석가로 근무하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4년 NSC에 파견돼 대북 문제를 전담했다. 2017년 1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NSC에서 남북한 문제를 전담하는 ‘한국국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북·미 실무협상에 줄곧 모습을 나타낸 인물이다.

향후 트럼프 행정부는 빅딜의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북측이 제시한 영변 핵 폐기안을 수용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스몰딜을 제시할 수도 있다. 미국평화연구소(USIP) 대북 전문가인 프랭크 엄 선임연구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3차 북·미 회담으로 복귀를 설득하려면, 스몰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전향적 입장을 카드로 내밀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AP 통신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스몰딜이라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빅딜에 많이 근접해야 미국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정통한 미국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하노이 정상회담 직전 실무협상 때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북측에 ‘이른바 비핵화 완료가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정의하고 이에 따른 ‘실행 로드맵’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북한이 이런 요구를 수용할 경우, 단계적 비핵화와 점진적 제재 해제도 가능하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혁철 외무성 특별대표는 답변을 미룬 채 “2016년 이후 유엔의 대북 제재 해제 안건만 논의하자”라고 고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핵 전면 폐기와 비핵화 로드맵이라는 빅딜 기조를 북한이 받아들인다면, 실천 과정에서 스몰딜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가 워싱턴 외교가에서 흘러나온다.

“트럼프, 빅딜 고수하지 않을 것”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 수정 가능성 여부와 관련해 또 하나 눈여겨볼 요인은 내년 11월 대선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연말’을 협상 시한으로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11월의 미국 대선을 앞두고 초조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기다. CNN은 “향후 3차 회담 개최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이보다 명확할 수 없다”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핵심 대선 후보인 조지프 바이든을 상대로 북핵을 선거 이슈로 제기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정책 실패의 주범으로 꼽는 오바마 행정부의 부통령 출신이다. 한반도 전문가인 존 메릴 박사는 “내년 대선이 다가올수록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대표적 외교 상표라 할 수 있는 북핵 협상이 결렬되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빅딜을 계속 고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협상 스타일을 볼 때 결국은 요구 수준을 낮출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스탠퍼드 대학 소속 한반도 전문가이자 워싱턴 정가의 외교통상 전문 정보지 〈넬슨리포트〉의 부편집자인 댄 스나이더는 복수의 현직 트럼프 행정부 관리들의 전언을 토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여전히 ‘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현직 고위 관리에게 들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 목표인 내년 대선에서의 승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3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밝혀 주목된다. 내년 대선이 빅딜과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변수로 떠올랐음을 시사한 말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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