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 전역을 유린했다. 선봉장이라 할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경우 조선땅 끝인 함경도 동북변 두만강까지 이르렀어. 두만강변은 변방 중에서도 험지여서 죽을죄를 겨우 면하고 귀양을 오거나 타지에서 강제로 끌려와 정착한 사람이 많았지. 그 가운데 국세필, 국경인 같은 사람은 조선 왕자를 사로잡아 일본군에 넘긴 뒤 항복하고 일본군의 꼭두각시가 됐어.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라문 아이되지 않슴둥?”이라고 외치며 자신들을 홀대했던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을 이끈 이가 정문부인데, 1709년 북평사 최창대는 함경도 주민들의 요청에 응해 길주에 그의 공을 기리는 ‘북관대첩비’를 세웠단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 북관대첩비는 난데없이 일본으로 옮겨지는 기구한 운명에 처하고 말았어.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 소장 이케다 쇼스케가 전리품 삼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봉헌’한 것이지. 1909년 일본에 유학하던 스물두 살의 한국 젊은이가 도쿄 유학생 모임 기관지인 〈대한흥학보〉에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 신사 한귀퉁이에 처박혀 있다며 분노했어. “누가 이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 (북관대첩비를 빼앗긴) 큰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이 젊은이의 이름은 조소앙이야.

ⓒ독립기념관조소앙 선생(아래)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외친 독립운동가이다.
한학을 공부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조소앙은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돼 1904년 일본으로 간다. 그는 영특하기에 앞서 용감하고 정의로운 대한제국의 애국자였어. 1905년 유학하던 도쿄 제일중학교 교장 가쓰우라 도모오가 “한국 학생들이 일본어는 빨리 배워도 수학, 과학은 어른들이라고 해도 일본 소년에도 못 미친다”라고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는 발언을 했어. 이때 조소앙이 유학생들을 선동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던 것은 항일과 독립운동으로 점철될 그 삶의 전주곡 같은 일이었지. 그는 경술국치 이후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만큼 괴로워했다고 해. “내가 동쪽으로 유학 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옛일을 더듬어보니 흐느끼며 통곡할 일이 많았다. 내가 나라의 은혜에 털끝만큼이라도 보답한 일이 있었는가(조소앙, 〈동유약초〉).”

그는 학업을 마치고 일찌감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어. 독립운동 진영에서 그의 이름 석 자가 두각을 드러낸 것은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 14명과 함께 공표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면서였을 거야. 그는 한때 망한 제국의 ‘은혜’를 기억하며 고종 황제를 ‘당수’로 추대한 신한혁명당과 함께했지만 대동단결선언에서는 이미 구시대를 버리고 있어. “주권이란 민족 고유한 것으로, 융희 황제(순종)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양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권 행사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데, 국내 동포는 일제에 구속되어 있으니 그 책임을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이어 조소앙은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기미년 3·1 독립선언보다 앞서서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 39명 명의로 발표한 ‘무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게 돼. 39명 가운데에는 박은식·이동녕·이상룡 등 쟁쟁한 선배 문장가들이 포진했지만 나이 서른둘의 조소앙이 붓을 든 것을 보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지. 이 선언서에서 주목할 대목은 조소앙이 단순히 독립을 넘어 어떤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지 어젠다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야. “군국주의 전제체제를 쓸어버리고 민족 간 평등을 전 지구에 실현하는 게 우리 독립의 첫 번째 뜻이며··· 모든 동포에게 평등한 부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남녀 빈부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 우리 건국의 깃발이다.”

조소앙은 문장가이자 사상가였고 동시에 실천가였어. 2·8 독립선언을 배후에서 고무하고, 의열단원으로 일본 경찰과 1000대 1의 총격전을 벌인 영웅 김상옥과 머리를 맞댔으며, 독립운동가들 81명의 삶을 역사에 남긴 〈유방집(遺芳集)〉 등 금싸라기 같은 기록을 남겼지.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요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 이후의 나라를 설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을 주의로 하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1931년 이후 임정의 공식 노선으로 확립된다.

납북된 조소앙, 소거된 삼균주의

ⓒ연합뉴스지난해 9월10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 60주기 추모제(위)가 열렸다.

조소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등을 이루려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화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보통선거제와 주요 산업의 국유제, 국비 의무교육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어. 또 민족과 민족의 균등을 이루기 위해 소수민족과 약소민족이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국가 간의 균등은 제국주의 타도와 전쟁 행위 금지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지. 언뜻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독립운동의 방법론이었고 해방 후 수립될 새 공화국의 방략으로서 충분한 비전(김삼웅, 〈조소앙 평전〉)”이었어.

삼균주의는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새 나라의 어른들’에게 커다란 기억과 영감을 남겼고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빛나게 된단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제18조).”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제84조).” 오늘날 한국의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보면 눈을 까뒤집고 덤빌 수도 있겠으나 유럽 등의 복지국가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공화국의 기본 정신이지. 이 조항들은 임정으로부터 왔고 동시에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손길과 정신에 닿아 있었던 거야.

해방 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정치적 경향에 공감한 것은 1950년 5월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을 돌아보면 알 수 있어. 제헌국회에 불참했던 조소앙은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했는데, 상대는 극우라 표현해도 무방할 우익의 거물 조병옥이었지. 미군정 치하에서 경찰 총수를 지냈던 조병옥은 경찰을 동원해 조소앙의 운동원 수십명을 잡아 가두고 두들겨 패는 등 엄청난 방해 공작을 펼쳤어. 그런데도 조소앙은 3만4000표를 얻으며 전국 최다 득표자로 당당히 국회에 입성했단다. 그 선거 25일 후 터진 전쟁은 모든 걸 수포로 돌리고 말았지. 조소앙에게 완패한 조병옥은 한국 정치의 거물로 성장한 반면 피란을 가지 못했던 조소앙은 납북됐고 우리 역사에서 지워졌으니까. 조소앙이 남긴 삼균주의의 흔적 역시 전쟁 후 더욱 칼날같이 곤두선 이념 대결 와중에 말끔히 소거되고 말았어.

해방 이후 탱크처럼 이 땅을 갈아엎으며 지나갔던 전쟁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스러지고 사라진 인물들은 너무나 많지. 그중에서도 임정 이래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 건설(한국독립당의 당강 및 당책)”을 수십 년 동안 외쳤던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이름에 오늘날 유달리 그리움이 치미는구나. 경제적 불평등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낙담하는 젊은이에게 세상이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 벽)’이 돼가는 요즘, 우리에게 ‘삼균주의’가 케케묵은 역사책 속 낡아빠진 단어일 수만은 없기 때문일 거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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