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무척 한적해 보였다. 몇몇 가구를 제외하고 주민의 대부분은 겨울을 나기 위해 육지로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만재도는 참 먼 섬이다. 오죽했으면 섬의 옛 이름이 ‘먼데도’였을까?

2박3일 가거도에서 거친 바람을 맞고 배낭을 멘 채 내내 걸었던 탓일까? 기력이 빠지고 몸살 기운도 느껴졌다. 게다가 비 소식까지 있다고 하니 선뜻 야영에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선착장을 지나는 아주머니께 물었다. “혹시 민박을 하는 집이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따라오라고 했고 곧 그이의 집으로 안내했다. “지금 섬에서 민박하는 집은 없어요. 작은방을 쓰도록 하세요.”

살림살이가 남아 있는 방은 작지만 따뜻했고 으스스했던 몸을 누이니 살 것 같았다. 저녁상에는 제육두부김치와 해물부침개 그리고 김국이 올라왔고 집에서 만들었다는 막걸리가 곁들여졌다. 메뉴의 반은 육지에서 들여와야 하는 것들이었고 그것에서 겨울 섬과 그들의 생활을 읽을 수 있었다.

ⓒ김민수T자형 섬 모양

만재도는 현재 신안군 흑산면에 속해 있지만 불과 1980년대 초반까지 진도군 조도면의 섬이었다. 맹골군도의 죽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이 만재도이다.

과거 전갱이와 아지가 많이 잡혀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만재도는 주변 섬들에 비해 어획량이 많고 부근의 무인도 등에서 거북손·홍합·배말·돌미역·가사리 등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그 덕에 자식들 교육도 시키고 뭍에 거처도 하나씩 마련했다. 하지만 자연이 내주는 선물은 무한하지 않다. 그것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 또한 늙고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섬의 면적은 0.59㎢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을 여행할 때는 서두르거나 부지런해서는 안 된다. 맛있지만 양이 모자란 음식을 먹듯이 찬찬히 음미하고 느끼며 즐겨야 하는 섬이 바로 만재도이다. 만재도는 최고점이 177m에 불과한 마구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단 하나 들어서 있다. 섬마을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낡은 가옥과 가옥 사이에는 좁다란 돌담길이 미로처럼 늘어섰고, 간간이 밭들이 옹색하게 놓였다.

해안절벽과 짙푸른 바다의 절묘한 조화

그중에는 〈삼시세끼〉 세트장으로 사용했던 마당 너른 집도, 성수기 때만 간혹 문을 연다는 ‘내맘대로’ 슈퍼도 있다. 마을 앞에는 ‘짝지’라 불리는 몽돌해변이, 그 뒤편으로는 주상절리의 벽을 타고 섬 능선이 길게 뻗어 있다. 만재도의 오롯한 모습을 감상하려면 마구산보다는 오히려 이곳이 적소이다.

ⓒ김민수만재도는 천천히 음미해야 할 작은 섬이다.

마을과 선착장 그리고 마구산, 섬을 둘러싼 무인도까지, 섬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는 최상의 자연미를 지녔다. 만재도는 T자 모양의 섬인데 동서로 솟은 가로 능선은 거친 바다를 온몸으로 막아선 형국이다. 그 때문에 풍파에 깎여나간 해안절벽이 아찔하고 짙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풍색 또한 절경이다.

만재도 등대는 마구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이 자그마한 등대는 34㎞ 동쪽의 맹골죽도 등대와 더불어 제주 서쪽 해역과 서해안 항만을 오가는 선박들에 중요한 지표가 된다.

몇몇 주민이 뭍으로 나가자 섬은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혹시나 남아 있는 주민들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는 남쪽 포구의 바위 앞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바람도 잔잔하고 봄기운이 완연해 침낭과 ‘비비색’만으로 잠자리를 꾸며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하루를 머물 때는 섬을 빨리 살펴봐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지만, 두 번째 날을 온전히 머무르는 느낌은 사뭇 느긋하고 평온하다. 달콤한 섬 공기를 맡으며 오수를 즐기고 나니 출출해졌다. 적당한 간식거리로 갯바위를 뒤져보는데 파도가 밀려 부서지는 경계의 틈 사이에는 어김없이 거북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재도 부근에서 채취된 자연산 해산물 중 홍합과 거북손은 크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것들은 다른 해산물처럼 급랭해 목포로 보내는데 ‘청정마을 만재도’란 사이트를 통해 소비자에게 판매된다.

마지막 날 오후 배는 제시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종선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안개 때문에 목포 출항이 늦어졌다고 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발전소 직원이 뭍으로 나갈 채비를 갖추고 선착장으로 왔다. “배가 늦게 온다고 하죠?” “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운이 참 좋으시네요.” “네?” “아침에 안개가 많으면 결항이 되기 일쑤인데요. 만약에 늦게라도 출항하게 되면 돌아갈 때는 거쳐가는 섬들을 모두 패스하고 목포로 바로 갑니다. 시간은 훨씬 단축되죠. 제가 이곳 발전소에 발령받은 지 6년 되었는데요. 오늘이 딱 세 번째입니다.”

6년에 세 번 있는 날, 정말 행운일까? 돌아가는 종선 뒤로 햇살에 흐드러지는 봄 섬 하나를 보았다. 

기자명 김민수 (섬 여행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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