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계기를 묻고 그런다냐.’ 봄봄(닉네임· 47)이 걷기 운동을 하며 투덜거렸다. 미리 받아본 질문지에 ‘비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묻는 대목이 있었다. 자주 받는 질문이기도 했다. 걸으며 생각해보니 답변이 달라지는 시기인 것 같았다. 서른 즈음 결혼보다 중요한 건 경제적 독립이었다. 그걸 이루고 나서도 결혼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40대에 접어들 무렵 또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결혼에 적합한가.’ 정서나 취향, 성격을 고려했을 때 아니었다. 30~40대를 지나는 동안 그의 곁엔 늘 비혼 여성들의 공동체 ‘비비(비혼들의 비행)’가 있었다. 그 안에서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끼고 보살핌을 받았다. 김란이씨(48)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가 고민했다. 서른 무렵 생각했다. 결혼하지 않은 삶도 괜찮지 않을까. 비혼이란 말로 정리가 되었다.

비비는 2003년 전주여성의전화 내 소모임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후 독립해 자체 공동체를 꾸렸다. 서른 즈음 만났던 이들 대부분 40대가 되었다. 시작부터 규칙은 두 가지뿐이었다. 매월 내는 회비, 정기적인 학습 모임. 공부하는 모임을 지향했다. 여섯 명으로 시작해 몇 차례 드나듦이 있었고 지금은 일곱 명이다. 만남이 이어지면서 유대감이 싹텄다. ‘돌봄’이 더해졌다. 서로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공부였다면, 돌봄은 서로에 대한 응원과 지지로 이어졌다.

비비가 지속되면서 구성원 각자가 비혼을 대하는 온도차도 드러났다. 모임 초반 이미정씨(45)는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족도 원했고 사회적 분위기도 때가 되면 결혼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비비 활동을 이어가며 서서히 혼자 살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최유정씨(40)는 좀 다르다. 어릴 때부터 결혼을 인생의 옵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20대 후반,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했다. 혼자 남는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비비를 알고 ‘언니들’을 만난 뒤에야 안정감을 느꼈다.
 

ⓒ시사IN 신선영비혼 여성 공동체 ‘비비’에 속한 봄봄, 최유정, 김란이, 이미정씨.

비혼은 목표가 아니라 상태

2010년 비비는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였다. 6년 뒤 협동조합 형태로 전환했고 현재는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1가 어느 상가 건물 3층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비혼 아카데미, 페미니즘 강연, 비혼 상담, 요가 수업 등을 진행한다. 부모를 돌보며 사는 한 명을 빼고 여섯 명은 모두 같은 아파트에 산다. 공공임대주택 제도를 활용했다. 다 같이 청소하고 집들이도 했다. 비용이 부족하면 회비를 무이자로 빌려주기도 했다. 가족보다 가까운 데 살았고 보지 않아도 든든하다. 그렇게 ‘1인 가족’ 네트워크를 이뤘다. 독립적인 삶도 중요시한다. ‘우리’보다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 잘 살 수 있는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들에게 비혼은 목표가 아니라 상태다.

최근 들어 비혼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는 걸 실감한다. ‘공덕하우스’같이 주거공간을 함께 쓰는 비혼 지향 공동체도 있다. 10~20대는 결혼이 여성의 무덤이라는 걸 자라면서 실감한 세대다. 김란이씨는 이들이 비혼을 운동의 방식으로 선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부장제를 전복하겠다는 혁명적인 맥락이 더 큰 것 같다. 선택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비혼’이기도 한 윗세대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전선을 지키기 위해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안쓰러운 마음도 들지만 활기차 보여서 좋다.  

나이가 들며 비비의 고민도 달라졌다. 부모 돌봄의 숙제는 주로 비혼인 자식에게 안겨졌다. 스스로에게도 노화가 닥쳤다. 일부는 가족 내에서 집사로 통했다. 문제가 생기면 형제와 부모 양쪽에서 호출했다. 비비 구성원들은 비혼 여성으로 살며 느꼈던 점을 바탕으로 정책 제안을 하기도 했다. 주거권, 건강권, 가족구성권 등에 대해 궁리했다. 이들은 부부와 아이로 이뤄진 ‘정상가족’ 위주의 주거 공급 제도에 의문을 가졌다. 1인 가구도 가족의 기초 단위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 현행대로라면 1인 가구가 함께 살더라도 환자가 생길 경우 그의 부모를 보호자로 찾을 수밖에 없다. 서울시 조례에서 발견한 ‘사회적 가족’이란 단어가 인상적이었다. 실제 그런 의미로 쓰이진 않았지만 결혼 중심의 가족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가족도 가족으로 인정해 걸맞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활용하기 적합한 단어였다.

이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이미정씨는 가족과 관련해 복잡한 일이 생기는 건 대부분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족 간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김란이씨는 누가 누군가에게 업혀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지켜봐주고 지지하며 걸어가는 것이 이상적인 가족이라 여긴다. 봄봄은 비비 안에도 가족성이 있다고 말한다. 혈연가족이든 비비 같은 공동체든 독립된 개인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혼자 잘 살아야 같이 잘 산다는 진리를 비비의 지난 16년이 증명하고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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