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를 쓰면서 폭식에 중독된 섭식 장애 엄마를 그렸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시나리오를 쓸 땐, 우울증과 싸우는 마커스 엄마 피오나의 힘겨운 시간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직접 연출할 영화의 이야기는, 엄마와 함께였지만 결국 엄마와 함께하지 못한 일곱 살 크리스마스에서 시작해보기로 했다. 엄마와 함께 보낸 그 하룻밤
〈길버트 그레이프〉의 작가 피터 헤지스가 경험으로 쓰고 가슴으로 연출한 영화 〈벤 이즈 백〉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정희진 교수의 칼럼, 그가 인용한 책의 이 대목이었다. “폭우 후 물살이 사납게 불어난 강물에 빠졌다. 다행히 통나무가 떠내려 와서 붙잡고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며 목숨을 부지한다.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자 헤엄치려 하는데, 한쪽 팔을 뻗는 동안 다른 쪽 팔이 거대한 통나무를 붙잡고 있다. 한때 생명을 구한 그 통나무가 이제는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가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한겨레〉 2013년 12월13일).”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했다. 난 운 좋게 강물에 빠지는 걸 모면하거나, 다행히 얕은 물에 빠져 걸어 나온 사람일지 모른다.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서 통나무에 의지해 겨우 버텨낸 사람이 그걸 뿌리치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지금’으로 돌아오는 건 너무 어렵고 ‘과거’로 돌아가는 건 너무 손쉬운 벤에게, 엄마와 함께 보낸 그 하룻밤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감히 그 마음을 헤아려보는 시간이었다. 그들의 하룻밤이 내게도 잊지 못할 밤으로 남았다. 애타게 엄마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일곱 살 아이가 커서 참 좋은 영화 한 편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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