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먼저 말을 걸어준 한국인은 처음이었다. 미야 씨(41·왼쪽)에게 박진숙씨(45·오른쪽)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공용어가 프랑스어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두 사람은 12년 전 한 난민 지원단체의 한국어 교사와 학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배움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미야 씨의 한국어가 느는 만큼, 불문학을 전공한 박씨의 프랑스어 실력도 더 좋아졌다.

250개가 넘는 부족이 존재하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역사는 내전으로 얼룩져 있다. 미야 씨는 콩고 내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2004년, 반정부 시위를 선동하기 위해 정보를 빼돌리는 스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부유한 집안 환경, 고학력 여성이라는 점이 되레 트집거리가 됐다. 친구가 급하게 구해온 한국행 비행기 티켓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야 씨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멸과 차별이었다.

ⓒ시사IN 신선영

‘친구’가 된 이상 미야 씨가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박씨는 미야 씨 같은 사람을 도울 방법을 궁리했다. 2009년 5월 박씨는 난민 이주여성을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 ‘에코팜므(Eco Femme)’를 만들었다. 돈 버는 방법이 아니라 그림을 가르쳤다.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이들이 ‘자기 방식대로’ 그려낸 그림에는 생경한 힘이 있었다. 한국 문화를 일방적으로 이식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문화를 경험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물로 에코백·머그컵·티셔츠 등 상품을 제작했다. 이 활동은 경력 단절 여성이었던 박씨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림이 밥 먹여주냐’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었죠. 차라리 가발 수선 같은 기술을 배우라고 하기도 하고. 돈만큼이나 중요한 게 자존감 회복이라고 생각했어요. 편견과 차별을 이겨내는 힘을 기르고 싶었어요.”

경기도 시흥에서 서울까지 왕복 3시간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던 미야 씨는 2011년, 7년을 다툰 끝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2014년부터는 에코팜므의 활동가로 일한다. 귀화 시험도 통과했지만 한국은 너무 ‘비쌌다’. 재정보증 조건(자산 6000만원 이상)을 충족시키지 못해 아직 한국인이 되지는 못했다.

5월31일 서울 마포구 ‘벨로주’에서 에코팜므 10주년 기념 콘서트 ‘재즈 인 아프리카’가 열린다. 이날 미야 씨는 박씨에 이어 에코팜므의 2대 대표로 취임한다. 난민 당사자가 난민 지원 단체 대표가 되는 역사를 썼다. 미야 씨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를, 여러 색깔과 다양한 소재로 완성되는 모자이크 작품에 빗댔다. “난민에 대한 오해와 걱정이 많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한국 사회를 좀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에코팜므를 그런 플랫폼으로 키우고 싶습니다.”(후원 문의:ecofemme.or.kr)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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