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애인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후 처음 서로의 가족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각자의 가족에게 분명한 선을 그어줬다. “30년 넘게 존재도 모르고 살던 사람들과 갑자기 가족이 되는 걸 납득할 수 없으니 남처럼 대해달라”고 당부했다. 며느리와 사위라는 지위를 거부한 셈이다. 내가 생각한 결혼의 장점 중 하나는 ‘주어진’ 원가족과 달리, 내가 ‘선택한’ 가족과 산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결혼이 집안의 일이 아닌 ‘두 사람의 일’이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결혼식 대신 술집을 빌려서 연 파티에는 양가 가족을 일절 초대하지 않았다. 나는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삶을 나누는 이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축하받고 싶었다. 청첩장도 찍지 않았고, 드레스도 입지 않았다. 결혼 절차 중 내가 동의하는 부분은 ‘사람들과 모여 맛있는 걸 함께 먹는다’는 게 전부였다.  

ⓒ시사IN 양한모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원가족이 화제에 오르면 결국은 숙연해진다.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가족들은 어딘가 조금씩은 부서지거나 뒤틀려 있다. 가부장제의 질서와 폭력의 그림자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 사회가 부여한 ‘정상’이라는 가치에서 탈락할까 봐 긍긍한다. 여기에 가난이 겹치면 불행에 이자가 붙는다. 한 친구는 체념하듯 말했다. “가족은 뭐랄까, 자연재해 같은 거야.”

‘정상 가족’을 절대적 기준으로 사유하는 이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미래에 우리는 이미 와 있다. 청년들이 결혼·연애·출산 등을 포기했다며 ‘n포 세대’라 뭉뚱그리고, 그 프레임 안에서 대책을 찾겠다고 호들갑 떤다. 그때 청년은 정책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다. 하지만 정말 저출생 같은 사회적 재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청년들이 무엇을 포기했는가보다는 결국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n포 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게 ‘나’다. 많은 정책과 제도가 ‘가정’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이 기본 단위를 ‘개인’으로 쪼개야 한다. “왜 혼자 사는가”라는 질문이 “혼자서라도 잘 살 수 있으려면 어떤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각자가 홀로 온전할 때 여럿도 잘 살 수 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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