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또한 피고인석에서는 법대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42년 평생 엘리트 법관으로 살았던 그가 지금까지 내려다보던 법정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구속 피고인 대기실에서 나온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날 받은 예우는, 공동 피고인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그의 등장과 함께 잠시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사법농단을 벌였다는 혐의로 전직 대법원장에 대한 첫 재판이 5월2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부장판사 박남천) 심리로 시작됐다.

검찰이 먼저 공소사실을 설명했다. 양승태 대법원이 벌인 사법농단 사례를 1시간 반이 넘도록 줄줄 읊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고위직이 박근혜 청와대 인사들과 만나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에 대해 논의하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 양승태 대법원의 눈 밖에 난 판사들에 대한 불이익 조치 의혹, 검찰의 영장 정보를 빼내 수사 상황을 파악하고 누설한 의혹, 헌법재판소장을 비난하는 칼럼을 대필해 언론사에 실은 의혹 등이 검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나왔다.

ⓒ시사IN 신선영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5월29일 법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의 대표적 ‘재판 거래’ 의혹으로 꼽힌다.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에 대해 국내 법원에 손배 소송을 제기했으나 1·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대법원이 판결을 뒤집어 피해자들의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에 따라 서울고법도 피해자 한 명당 1억원씩 배상 판결을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양승태 대법원은 판결을 계속 미뤘다. 이유는 사법농단 사건이 밝혀지면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코드에 맞춰 양승태 대법원이 조직적으로 동원돼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관한 문건과 증언 등이 계속 나왔다. 결국 피해자의 승소는 지난해 10월에야 확정됐다. 6년5개월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 9명 중 8명이 숨졌다.

검찰은 이 같은 혐의 등으로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 47개 혐의를 적용해 구속 기소했다. 검찰의 공소장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법관의 재판상 독립은 법치국가에 있어 재판의 본질을 구성하는 헌법 가치다. 사법부 외부로부터의 독립은 물론 사법부 내부로부터의 독립도 포함된다. 구체적인 특정 재판에 있어 법관은 대법원장 등의 지휘·명령을 받지 아니하고, 소송 절차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지시 간섭받거나 재판의 절차·내용·결정 등을 취소·변경할 수 없다.”

곧이어 양 전 대법원장 쪽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변호인보다 더 큰 목소리로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300쪽에 달하는 검찰의 공소장이 한 편의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민주 절차를 채택하고 시행하는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 외에 어디에 더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자신이 당한 검찰의 수사와 관련해서 “사찰이 있다면 이런 것이 사찰”이라고 주장했다.

양승태 자신이 1975년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시작해 수많은 재판을 수행했지만, 이렇게 ‘잔인한 수사’는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밝혀진 사법농단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도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 관계자는 다음 날 기자들과 만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법원과 검찰을 모욕했다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재판부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또한 현재 1심을 진행하는 재판부가 보석 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 모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범죄 혐의가 충분히 소명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뿐만 아니라 재판부까지 모욕했다.”

노골적인 비협조와 재판 지연 전략

 

ⓒ연합뉴스양 전 대법원장보다 먼저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검찰은 또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판 지연 전략을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의 노골적인 비협조로 재판이 4개월 만에 처음 열렸다. 양 전 대법원장 구속기한이 8월인데, 그 전까지 검찰 증인의 10%도 못 부른다.” 재판을 지연시켜 구속기한 만료 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으려는 행태라는 지적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첫 재판이 열린 5월29일 같은 날,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부장판사 윤종섭)에서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도 진행됐다. 양 전 대법원장보다 먼저 구속된 그는 1월30일부터 재판을 받고 있지만, 검찰은 임 전 차장도 재판 지연 전략을 쓴다고 의심한다. 임 전 차장은 첫 재판부터 출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변호인 11명 전원이 사임했다. 법원 측이 주 4회 집중심리를 하겠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거에 양승태 대법원 측은 재판관들에게 집중심리를 적극 권장한 바 있다.

임종헌 전 차장 또한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공소사실은 검찰이 만든 미세먼지로 형성된 신기루와 같다. 그런 허상에 매몰되지 말라”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그 또한 적극 변론에 나서며 검찰을 향해 날선 말을 쏟아냈다. 변론 중 검찰을 향해 ‘웃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재판부의 주의를 받았다.

그의 재판에는 현직 판사들이 증인으로 출석해,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 5월30일 재판정에 나온 최 아무개 부장판사는 2015년 2월부터 2019년 2월까지 헌법재판소에 파견되어 있었다. 당시 헌재에서 진행 중인 사건 관련 정보를 피고인에게 전달했다고 인정했다. 임 전 차장이 전화해서 물어본 사건 정보로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예상 결과와 방향’ ‘201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등이 있다고 증언했다. 검찰에 따르면, 최 부장판사가 피고인에게 전한 정보는 일제 강제징용 사건의 일본 기업 쪽 김앤장 법률사무소에도 전달됐다.

4월2일 임종헌 전 차장의 재판 증인으로 출석한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 또한 피고인의 지시를 증언했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지시를 받고 여러 문건을 썼다”라고 진술했다.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불거진 사법농단 사건에서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전·현직 법관 14명을 기소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기소되진 않았지만 사법농단에 연루된 현직 법관이 66명에 이른다. 검찰에서 명단을 넘겨받은 대법원은 이 중 10명만 징계 청구를 했다. 32명은 징계 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밝혔다. 징계 법관의 명단 또한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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