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집에 혼자 사는 남자가 이사를 왔다고 치자. 이러저러하게 눈인사를 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또 다른 이웃에게서 그 남자가 교도소에 갔다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그 사람을 전처럼 살가운 이웃으로 대할 수 있을까? 그 남자가 이제는 모범 시민으로 산다고 해도 당신 앞에 선 사람은 여전히 악인으로 남는다. 이게 낙인효과다. 한마디로, 한번 낙인이 찍히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

교도소 수감자에게만 낙인이 찍히는 건 아니다. 이 사회는 다방면에 걸쳐 낙인찍기를 서슴지 않는다. 질병도 그중 하나다. 〈사진에 관하여〉 〈타인의 고통〉 〈해석에 반대한다〉 등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수전 손택의 또 다른 책 〈은유로서의 질병〉을 보면 질병이 어떻게 낙인이 되는지 잘 알 수 있다. 수전 손택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에 관해 사람들이 특정 질병과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우리 사회에는 특정 대상을 향한 수많은 낙인과 편견이 존재하는데, 특히 특정 질병에 대한 은유를 통해 강화되고 확산된다는 점을 그녀는 이 책에서 지적한다. 예를 들면 보수 정치인과 종교인들은 에이즈(후천 면역결핍증)를 ‘도덕적 파산’ 혹은 ‘신의 법도대로 살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빗대 말한다. 이런 은유가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진다. 최근 국내에서 번져가는 동성애와 에이즈 혐오 현상 또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혐오감을 조장하는 계층은, 사회를 신체에 비유하고 질병을 적으로 비유함으로써 불필요한 의미를 양산하고 질병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한다. 이들은 질병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질병 당사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며 사회적 타자로 몰아간다.

2014년, 나는 우연히 남아프리카에서 에이즈 고아 12명을 돌보는 한국인 선교사를 만났다. 처음에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의 삶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에서 취재를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한 달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 선교사한테 한 가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아이들에게 ‘에이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냥 아픈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특정 질병에 대한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들은 부모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모두 사망했거나, 부모가 살아 있어도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부분 가난한 지역에서 왔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성매매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되고, 이후 가족에게 전염시켜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이었다.
 

ⓒ김성민 제공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체피소는 부모를 에이즈로 잃었다. 치과의사가 되는 꿈을 꾼다.


아이들에게 그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

두피를 파고드는 심한 곱슬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나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신기한지 옆에 와서 자꾸 만지곤 했다. 처음에는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들이 나를 만진다는 게 두려웠다. 내 두려움 또한 질병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에이즈는 단순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사회에서 만들어낸 질병과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낙인을 찍으며 산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지 안 하는지 차이로 우리 사회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철학자 강남순 교수(미국 텍사스크리스천 대학 브라이트 신학대학원)는 “인간이 다양한 타자를 ‘동료 인간’으로 존중하는 코즈모폴리턴 시각을 가지고, 환대와 연대를 나누는 ‘포용의 원’을 조금씩 확장해갈 때 이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회에서 타자라고 규정된 사람을 동질성을 가진 ‘우리’로 포용하고 안아줄 때, 그들에게 덧씌워진 낙인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때 사회는 ‘지속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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